매일신문

[정민아의 세상을 비추는 스크린] 관능의 법칙

솔직 40대의 19금 도발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영화 마케팅의 주요 타깃은 20대 여성이었다. 20대 여성이 영화 선택의 결정권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는 로맨틱 코미디의 성장과 미남 배우 전성시대를 연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20대는 이제 고달프다. 88만원 세대라는 슬픈 듯 애처로운 타이틀을 달고서 바삐 살아간다. 대중문화의 주도권은 이제 30, 40대가 쥔 듯하다. 텔레비전의 '응답하라' 시리즈와 '나는 가수다'는 1990년대를 소환하여 노스탤지어 감수성을 자극함으로써 성공했다. '아빠 어디가'와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아빠 역할 놀이는 아빠 신드롬을 일으키며 중년 남자의 가정에서의 위치를 확인해 주었다. 영화 '써니'와 '변호인'은 치열한 한 시대를 살았던 이들에게 보내는 연가 같은 작품이다. 새로운 얼굴보다는 관록 있는 중견배우들의 활약이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다. 가정이 자녀의 대학 보내기 프로젝트 공동체로 변질된 지 오래인 이 기이한 세상에서, 엄마 아빠도 놀고 싶어 하고 섹시하고 연애도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화끈한 콘텐츠가 그래서 더더욱 기대가 된다.

'관능의 법칙'은 '우리 아직 살아있다'를 보여주는 선수들의 영화다. 영화는 40대 여성들의 농염함과 도발성을 무기로 한다. 어린 남자와 만나는 골드미스 엄정화, 밤이면 밤마다 당당하게 남편에게 원하는 전업주부 문소리, 딸 몰래 연애하는 싱글맘 조민수가 삼인삼색 로맨스를 펼친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이수아의 시나리오에 '싱글즈'의 권칠인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2012년에 '건축학개론'으로 공전의 히트를 하며 복고 코드와 첫사랑 열풍을 이끌었던 영화사 명필름이 제작했다. 제작사, 시나리오, 감독, 배우의 라벨만으로도 믿고 볼 만한 작품인 것 같다. 40대 부르주아 여성의 가족, 직장, 연애, 결혼, 성 문제, 자녀, 질병 문제 등 많은 이야깃거리들을 담는다.

영화는 한국판 '섹스 앤 더 시티' 같다.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을 하나로 이끌어가는, 철없고 사랑밖에 모르되 일에 통달한 여성이 있고, 더 세고 더 야한 것을 추구하는 자유분방한 여성이 있으며, 여전히 순수한 연애를 꿈꾸는 핑크 마니아 여성이 있다. 각각은 여성의 주체적 자아 찾기, 여성적 섹슈얼리티, 가족 로맨스 눈물의 주인공으로서의 역할을 해낸다. 하지만 이 조합은 신선하지 못하고, 각각의 무대는 구경하기에 좋은 원맨쇼 정도에 그친다. 이들은 햇빛 밝은 창가에서 우아하게 브런치를 즐기고, 고급스러운 옷을 걸친 날씬한 몸매를 자랑한다. 각자의 성생활을 유쾌하게 나눌 만큼 속 깊은 사이이지만, 직업인으로서의 갈등, 전업주부로서의 애환, 싱글맘으로서의 불안함 등 현실적인 고민이 가슴 뭉클하게 전달되지는 않는다. 영화는 으레 예상할 법한 정도의 해결책을 뛰어넘지 못한다.

엔터테이너에서 진정한 연기자로 거듭난 엄정화, 늘 최고의 생활연기를 보여줬던 문소리, '피에타'로 예술영화에서도 통한다는 것을 입증한 조민수의 캐스팅은 기대를 하게 만들지만, 이들이 제대로 감정을 끌어올린 연기를 할 기회가 별로 없다. 10년 전 서른을 앞둔 남녀의 성, 사랑과 삶을 기획영화 차원에서가 아니라 진짜 살아있는 현실적 고민의 차원으로 묘사하여 당시 많은 지지와 기대를 받았던 '싱글즈'의 감독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작품은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싱글즈'에서 조연이었지만 주연인 고(故) 장진영보다 더 드라마틱한 플롯을 이끌어가며 여성의 주체적 삶의 선택에서 박수를 받았던 엄정화를 주연으로 택한 영화의 전략은 영리하지만 효과를 크게 보지는 못한다.

심재명이라는 걸출한 영화 프로듀서가 만들어낸 명필름의 영화 프로필들은 현대 여성영화라는 장르의 성장과 변주의 역사다. 1996년, 뚱뚱한 여자의 연애담을 소재로 한 '코르셋'을 시작으로, PC 통신 시대의 온라인 사랑과 실연이 남긴 상처를 안고 또 다른 사랑을 찾기 위해 애쓰는 고독한 사람들을 그린 '접속', 유부녀의 불륜 이후 후폭풍을 그린 '해피 엔드', 혼외정사를 통해 현대 부르주아 가족의 위기를 다룬 '바람난 가족', 핸드볼에 인생을 건 대한민국 보통 아줌마들의 눈물 나는 투지를 담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등, 명필름 영화들은 여자들이 발 딛고 서 있는 바로 그 현장에서 건져 올린 고민들을 플롯화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캐릭터들은 강한 생명력을 가지게 되었고, 완성된 작품은 생동감이 넘쳤으며 대중적인 공감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관능의 법칙'은 명필름 프로필에서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작품은 될 것 같지 않다. 40대를 대표하는 세 명의 주인공은 스테레오 타입으로 그려져 신선한 자극이나 공감을 주는 데는 미흡하다. 오히려 이들을 둘러싼 조연들의 이야기가 더 궁금해진다. 이들의 이야기가 더욱 현실감이 넘치고, 바로 지금 우리 모두의 고민을 응축한 이야기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비정규직 88만원 세대로 요즘 같은 불경기에 독립은 언감생심, 연애나 하고 결혼은 미루다 덜컥 임신해서 결혼한 조민수의 딸 전혜진은 아등바등 고난에 찬 현실을 헤쳐 나가기 위해 골몰한다. 엄정화의 어린 애인 이재윤은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정글 같은 직장에서 살아남기 힘드니 능력 있는 연상 애인을 통해 자신의 출세를 이루는 영악하고도 현실적인 캐릭터이다. 외주제작사 대표 권해효는 늘 을의 입장에서 이전 방송국 동기인 엄정화에게 굽실거리고, 저급한 미디어 환경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어쩔 수 없이 체득한다. 훨씬 현실적인 고민을 담고 있는 조연 캐릭터들이 살짝 배경으로만 그려진 건 이해되지만, 이들에 더 공감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었다.

이 영화가 연애놀이보다는 우리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통한 공감의 영화가 되는 전략을 취했다면 어땠을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위안의 목소리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영화평론가 yedam9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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