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임란 3대첩(三大捷)으로 진주대첩, 한산대첩, 행주대첩을 꼽는다. 뛰어난 전과는 물론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전투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별로 눈여겨보지 않는 승전도 있다. 황해도 연안성 전첩과 양주 해유령(蟹踰嶺) 전첩이다. 이 두 전투는 조선이 육전에서 거둔 몇 안 되는 승전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부원수 신각 장군 등이 선조의 어가를 추격하는 가토 기요마사의 70여 특공대를 물리친 해유령 전투도 그렇지만 연안성 전투는 후세에 큰 교훈을 주는 전첩이다. 이 전투의 중심인물은 퇴우당 이정암(1541~1600)이다. 퇴우당은 전란이 터질 무렵 이조참의였다. 피란 떠난 선조를 뒤늦게 호종했다가 체직되면서 황해도를 전전하다 연안으로 들어갔다. 연안은 20년 전 그가 부사로 있던 고을로 백성들은 그의 선정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1592년 음력 8월, 퇴우당은 의병과 백성을 모아 만반의 대비를 했는데 1천 명이 조금 넘었다. 해주로 진격하던 구로다 나가마사의 왜병 5천이 연안으로 물밀듯 쳐들어왔다.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는데 전세가 위태롭자 퇴우당은 섶을 쌓고 그 위에 올라앉아 지휘했다. 나흘간의 결사항전 결과는 컸다. 죽거나 다친 왜병이 5천 중 절반을 넘자 왜군은 연안성을 포기하고 말머리를 돌렸다고 한다.
전황을 알리는 첩지가 조정에 도착했다. '28일에 성을 포위했다가 2일에 포위를 풀고 돌아갔습니다'(以二十八日圍城 以二日解去)라는 딱 한 줄이었다. 앞뒤 상황과 전과에 대한 내용은 한마디도 없었다. 선조수정실록에 보이는 '적을 물리치기는 쉽지만 공을 자랑하지 않기는 더욱 어렵다'는 대신들 반응에서 당시 분위기를 읽어낼 수 있다. 지금 생각하면 생사를 건 싸움에서 혼이 달아나고 넋이 빠진 마당인데 무슨 힘이 남아 공치사할 경황이 있었겠나 싶다. 하지만 숱한 관리와 장수들이 겁에 질려 달아나기에 바빴던 당시 상황에서 왜적을 물리치고도 전공은 입에 담지도 않았으니 퇴우당의 사람 됨됨이가 어떤지 짐작할 수 있다.
지방선거가 10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이 사람 저 사람 출판기념회 소식을 담은 휴대전화 문자 알림이 잦다. 정치인은 책 쓰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책 안 내는 사람이 드무니 불가사의한 일이다. 속된 말로 입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라 못다 한 말을 책에 담으려니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런 류의 출판기념회는 딱 한 줄로 설명된다. '나 이런 사람이야' 대놓고 자랑하고 후원금도 챙기는 자리다.
이런 비판 여론을 의식해서인지 요즘 출마자들의 출판기념회는 이색(異色)을 끼워넣고 있다. 끼리끼리가 아니라 소외 계층도 참여시키고 아예 봉투를 없애거나 수익금을 복지단체에 기부하는 등 그 나름 고민도 한다. 하지만 정작 출판기념회의 주인공인 책에 대한 고민은 없다. '얼굴 알리기용'이라는 정치인 책의 생리를 생각하면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하지만 시민을 대표한다는 사람들이 공익을 위해 어떤 일을 할까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않고 자기 과시에 열을 올리는 것은 분명 잘못됐다.
민주당은 최근 국회의원 특권 혁신안을 내놓으면서 출판기념회에 대해 감독을 강화하겠다고 했다. 여당 대표도 신년 기자회견에서 출판기념회 등 정치인의 특권 내려놓기를 거론한 마당이다. 아무리 알릴 것은 알리고 피할 것은 피하는 시대라지만 책을 매개 삼아 자기 공치사나 하는 한국식 정치 출판 문화는 우습다. 무엇보다 시중에 거의 유통되지도 않는 정치인의 책에서 어떤 소통이 이뤄질지 궁금하다.
흔히 정치인의 출판기념회는 일석삼조라고 한다. 간혹 직접 집필하는 사례도 있지만 대부분은 대필이다. 책 쓰기가 그만큼 어려운데 한순간에 책 저자가 되니 첫 수확이고 책을 통한 낯 세우기와 합법적인 정치자금 모금이 그 세 가지 이득이다. 당사자 입장에서는 전혀 손해 볼 게 없는 일이지만 누가 봐도 여전한 '구태 정치'다.
공직선거법에 선거일 전 90일부터 선거일까지 입후보 예정자와 관련된 출판기념회는 금지하고 있다. 오는 3월 6일부터는 선거 관련 출판기념회도 할 수 없다. 20일 뒤면 출판기념회 문자 대신 사무실 개소식이나 공약 발표회 등의 알림이 대신할 것이다. 이제는 장황한 서론만 있고 알맹이는 없는 정치 문화를 바꿀 때가 됐다. 퇴우당의 한 줄짜리 첩지에서 해답을 찾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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