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준희의 교육 느낌표] 切問而近思⑥ - 위대한 탈주는 내 길을 걷는 것

이제 필요한 것은 또다시 이분법의 레일 위에서 성급하게 해답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물음 그 자체를 바꾸는 것, 그럼으로써 주어진 레일을 아예 벗어나는 것일 터이다.(고미숙의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중에서)

삶이란 길에서 해답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스스로 찾는 것은 더욱 어렵고 고통스럽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주어진 레일 위를 걸어간다. 레일은 굳건히 고착돼 있고 절대적인 힘을 발휘한다. 레일이 힘을 발휘하는 것에 비례해 개별적인 인간은 그만큼 고립된다. 방법은 없을까? 해답을 주어진 레일 위에서 찾지 말고 질문을 바꾸어보는 것.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 질문을 바꾸거나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서 공부가 필요하다.

인간은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 공부의 1차적인 대상은 물론 텍스트(text)다. 하지만 텍스트에서 진리를 찾으려는 노력은 무의미하다. 글쓴이가 제공하는 진리는 이미 글쓴이가 활용해버린 지식이다. 따라서 진정한 텍스트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정해진 레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텍스트는 시작하는 순간 닫히기도 하고, 다시 열리기도 하고, 확대되기도 하고, 축소되기도 하고, 생산되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한다. 일정한 힘이 텍스트를 지배하려고 하면 텍스트는 더욱 저항한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텍스트를 지배하려는 힘은 텍스트가 지닌 원심력을 결코 이길 수 없다.

많은 텍스트를 접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하나의 텍스트 자체가 이미 다양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에 텍스트를 제대로 공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질문이다. 텍스트에서 찾아야 할 것은 진리가 아니라 질문이다. 한동안 '리좀'(Rhyzome)이란 단어에 완전히 매료된 적이 있다. 그 본질을 찾아 들뢰즈와 가타리가 쓴 '천 개의 고원'을 이해하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다 최근 고등학교 1학년에서 중퇴하고 자유롭게 공부에 매진한 21세의 김해완이 쓴 '리좀, 나의 삶, 나의 글'이란 책을 읽고 '리좀'이란 단어의 가장자리까지는 다가갈 수 있었다. 나에게는 '천 개의 고원'보다는 '리좀, 나의 삶, 나의 글'이 적당한 텍스트였던 셈이다. 물론 텍스트에 나오는 모든 마음에 대해 동의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텍스트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했다. 책에는 수많은 밑줄과 낙서가 함께했다.

김해완은 자신에게 주어진 레일을 거부하고 규정된 레일을 벗어났다. 그것을 탈주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면 지금의 젊은이들이 모두 김해완처럼 탈주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 '리좀, 나의 삶, 나의 글'이란 텍스트를 그렇게만 받아들였다면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의 독서이다. 현재를 견디지 못하고 도피하는 것은 진정한 탈주가 아니다. 탈주는 '지금 여기'에서 나의 길을 걸어가는 그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그것이다.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바로 이런 마음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 바로 공부이다. 학교는 그것을 위한 공부를 하는 곳이다.

구석진 골방에서, 또는 깊은 절간에서 혼자만의 공부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공부는 함께하는 것이다. 개개인이 모두 전지전능한 존재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함께 공부하면, 그럼으로써 타인의 능력과 접속하면 전지전능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중국어를 완전히 배우려면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필요하다. 방법은 중국어를 잘하는 사람과 함께하면 된다. 진정한 공부는 시간과 공간을 함께하고 서로의 지식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제 알겠는가? 진정한 탈주는 바로 '나'를 넘어 '우리'로 걸어가는 거기에 있다는 것을. 젊은이들이 가장 먼저 할 일은 바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 관계의 증식이라는 것을.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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