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사만어] 눈과 낭만에 대해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속에 뛰어들어/ …/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겨울사랑', 문정희)

낭만적이다. 시인은 남녀 간의 사랑을 눈 오는 풍경에 빗대 표현해 짜릿한 여운을 준다. 눈과 관련된 또 다른 시를 보자.

왜 첫눈이 오는 날/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하는걸까/ …/ 첫눈과 같은 세상이/ 두 사람 사이에 늘 도래하기를/ 희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한때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있다/ 첫눈이 오는 날/ 돌다방에서 만나자고/ 그런 약속이 없어지면서/ 나는 늙기 시작했다/ 약속은 없지만 지금도 첫눈이 오면/ 누구를 만나고 싶어 서성거린다/….('첫눈 오는 날 만나자', 정호승)

누군가에게 눈은 낭만이다. 눈이 오면 가슴 설레는 첫사랑이 생각나고 아련한 옛 추억을 더듬으며 상념에 빠지기도 한다. 과거 아침에 눈을 뜨니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던 적이 있었다. 어릴 때에는 얼른 뛰어나가 눈사람을 만들고 눈 미끄럼을 타고 싶었다. 좀 커서는 영화 '러브스토리'의 한 장면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눈밭을 뒹굴며 추억을 만들고 싶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첫눈이 오면 지인들과 영화 '닥터 지바고'를 보면서 눈 내리는 날을 자축하기도 했지만, 요즘은 좀 시들하다. 세월이 가면서 감성의 샘이 조금씩 말라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눈이 지나치게 많이 오면 낭만은커녕 재앙에 가깝다. 지난 한 주 동안 동해안 지역에 때늦은 폭설이 내렸다. 필자가 사는 포항에는 비닐하우스와 축사가 무너지고 교통이 마비돼 아수라장이었다. 사무실을 나서면 눈바람이 몰아쳤고 걸음마저 옮기기 어려웠다. 포항에는 눈보라가 몰아치는데도, 그리 멀지 않은 대구에는 화창한 날이 계속됐으니 여간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 젊은 분이 "눈을 정말 좋아했는데 이제 눈이라면 지긋지긋하다"고 하기에 모두가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어디 눈뿐이랴. 정도가 지나치면 낭만이나 아름다움은 어디론가 날아가고 고통밖에 남지 않는다. 인간의 삶 자체가 그런 것이 아닐까. 우리 사회에는 권력, 돈, 명예를 위해 정도에 지나치게 행동하고 사고하는 이들이 아주 많다. 당리당략에만 골몰하는 정치권이나 실컷 벌고도 사회에 되돌려줄 줄 모르는 재벌이 대표적인 사례가 아니겠는가. 어쨌든 '눈이 많이 오면 농사는 풍년'이라고 하는데 정말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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