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을 보니 미수(88세)를 맞은 할머니가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남편을 위해 발장갑을 뜨고 있는 사진이 나와 있다. 남편의 발이 하루하루 차가워져 가는 것이 안타까워 뜨개질을 시작했다고 한다. 주름 가득한 얼굴에 돋보기를 걸치고 한 코씩 힘들게 뜨개질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짠하다.
오래전 23개국 언어로 발행되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16세기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짚신 한 켤레를 소개했다. 안동에서 택지를 개발하기 위해 선조의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남자 미라와 함께 발굴된 것이다.
남편이 요절하자 아내는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짚신 한 켤레를 삼아 관 속에 넣었다. 현대의 남녀평등 사조에 비춰볼 때 과연 여인에게 그토록 헌신적인 사랑을 강요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는 별도로 치자. 나는 아내가 사랑의 징표로 머리카락으로 신발을 삼았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녀는 왜 하필 신발을 만들었을까. 죽어가는 남편을 두고 그녀는 왜 유독 발을 걱정한 것일까.
혹자는 이 사실을 철학적 혹은 추상적으로 접근하지만 나는 반대다. 사랑은 그렇게 복잡하거나 모호한 것이 아니다. 특히 부부지간에 있어서는. 사랑은 보다 단순하고 구체적이다. 아마도 남편의 수면 때문이었으리라. 인간은 몸이 편치 않으면 발이 편치 못하고, 발이 편치 못하면 잠을 이룰 수가 없게 되어 있다. 발은 신체의 온갖 경락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투병 중에도 그녀는 남편의 발을 다스렸으리라 짐작한다. 주무르기도 하고 쓰다듬기도 하고 비비기도 했을 것이다. 이불에 묻기도 하고 가슴에 품기도 하고 간간이 지그시 눌러 막힌 혈을 통하게도 했으리라. 남편은 아내의 손에 의해 잠시나마 병마의 고통에서 벗어나 편안한 잠에 빠져들곤 했을 것이다. 죽어서도 함께 묻은 짚신을 아내의 손길로 알고 편히 주무시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삶은 결국 걷거나 뛰거나 마라톤이다. 발로 시작하여 발로 뛰다가 발로서 끝을 맺는다. 전쟁으로 치면 발은 전투부대의 선봉대인 셈이다. 발은 내 것이되 내 것이 아니고 내 것이 아닌 줄 알지만 결국은 내 것이다.
나도 이제 누구든 만나면 발의 안부도 좀 물어야겠다. 잘 지내시죠? 당신의 발도 편안하신가요? 그런데 차가워져 가는 남편의 발을 위해 뜨개질에 몰두하고 있는 할머니는 어떻게 하나. 미수를 맞은 저 할머니의 메마른 발은 누가 있어 피가 돌게 만져드릴까.
소진/에세이 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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