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건강해져서 고향에 가고, 엄마를 보러 갈 거예요."
24살 알리 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아기처럼 엄마를 찾는다. 뇌 수술을 한 지 두 달밖에 되지 않은 그에게 '몸은 괜찮냐'고 안부를 물으면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괜찮다'고 답한다. 몸이 나아야지 집에 갈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엄마 보고 싶어요. 몸은 하나도 안 아프니깐 빨리 집에 갈 수 있게 도와주세요."
◆노래를 불러 행복했던 지역 가수
알리 씨는 인도네시아 자바섬 바닷가 작은 시골마을에서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가난한 집이었지만 성실한 아버지와 자상한 어머니 덕에 알리 씨 남매는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어릴 적부터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던 알리 씨의 꿈은 가수였다. 18살에는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자신의 노래는 아니지만 지역 축제 등 각종 행사에서 노래를 부를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큰돈이 되는 일은 아니었지만 무대에 설 수 있어 알리 씨는 누구보다 행복했다.
"유명한 가수는 아니었지만 노래를 불렀어요. 돈은 별로 못 벌었고 일도 많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일이 없을 때는 아버지랑 같이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나가기도 했죠."
하지만 가난한 살림에 형과 누나들이 모두 시집을 가면서 집에는 빚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의 경제가 빠르게 발전하면서 물가는 높아졌지만 생선을 잡고 허드렛일을 하는 아버지와 지역 가수로 활동하는 알리 씨가 버는 돈은 그대로였다. 착실하게 살았지만 조금씩 빚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역가수로 활동한 지 5년째 되던 해, 가난에 지친 알리 씨는 돈을 더 벌 수 있는 곳을 찾기로 했다. 때마침 고향 친구가 한국 어선에서 일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을 들었고, 3명의 친구와 함께 선원취업 비자를 받아 지난해 2월 한국으로 들어왔다.
"뱃일이라면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도와 했던 일이고 돈을 벌면 빚을 금방 갚고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어요."
◆돈을 모아 고향으로 돌아가는 행복한 꿈
한국 어선에서의 일은 알리 씨의 생각과는 너무 달랐다. 하루종일 무거운 그물을 들어 올리느라 허리 한 번 펼 틈이 없었고, 한국인 선장에게 비자와 여권까지 뺏기는 신세가 됐다. 돈을 벌어 부모님을 모시겠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버티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먼저 일하고 있던 동료들의 말은 달랐다. 월급은 한 달에 50만원 정도 수준이었고, 그조차도 미루고 주지 않을 때도 많다는 것이다.
한국에 온 지 2주 만에 알리 씨는 일하던 배에서 도망쳐 나왔다. 함께 도망친 동료가 플라스틱 공장에서 일하는 친구로부터 연락을 받고 알리 씨를 경산으로 데리고 와줬다.
"비자도 없고 여권도 없어서 잘못된 일이라는 건 알았지만 한 달에 100만원 넘게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경산으로 왔어요."
다행히 경산 공장에서는 가족처럼 여겨주는 사장과 동료들 덕분에 안정을 찾았다. 공장에서 알리 씨는 성실함으로 인정받았다. 공장 기숙사에서 지내며 한 달에 130만원 월급 중 100만원을 매달 인도네시아 집으로 보냈고, 8개월 동안 일을 하면서 빚도 대부분 갚아 나갔다. 알리 씨는 빚을 다 갚고 돈을 모아 부모님을 잘 모시고 자신도 좋은 짝을 만나 행복하게 사는 미래를 그렸다.
"저뿐만 아니라 동료들 대부분이 돈을 쓰고 싶어도 참아가며 고향에 보냈어요. 사장님, 사모님이 부모님처럼 대해주셔서 고향이 그리웠지만 참을 수 있었어요."
◆뇌간 출혈로 돌아가지 못하는 고향
하지만 알리 씨가 그리던 미래는 갑자기 깨져버렸다. 건강했던 그였지만 지난해 12월 초부터 자주 머리가 아프더니 12월 18일에는 갑자기 심한 두통에 시달렸다. 이내 알리 씨는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등 이상한 행동을 보였고 병원을 찾게 됐다. 병원에서 알리 씨는 뇌간 출혈 판정을 받았다. 뇌간 출혈은 뇌에 발생하는 뇌출혈 부위 중 생명을 가장 위협하는 것이다. 발생하면 3분의 1 정도는 사망에 이른다. 또 수술을 하더라도 상당수는 마비 등의 장애가 남기도 한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알리 씨의 뇌간 출혈은 일찍 발견됐다. 수술을 하고 한 달가량을 중환자실 신세를 져야 했다. 수술을 마친 알리 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엄마를 부른다. 엄마 얘기를 하다 보면 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다. 지금 알리 씨의 꿈은 하나다. 부모님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가족 하나 없는 이국 땅에서 알리 씨는 힘든 수술을 이겨냈고, 서서히 건강도 되찾아가고 있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걷지도 못하던 그가 지금은 누군가의 부축을 받아 걷고 병문안 오는 동료들과 대화도 나눈다. 건강해지면 집에 갈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계속 '괜찮다'는 말을 반복한다.
"안 아파요. 괜찮아요. 집에 갈 수 있어요."
하지만 알리 씨가 고향에 가는 길에는 아직도 장애물들이 많다. 한 달간의 간병비 130만원은 사람 좋은 사장님이 내줬고, 인도네시아 근로자모임에서 200만원 정도의 병원비를 모아줬지만 수술비와 중환자실 입원비 등 지불해야 하는 돈이 1천700만원이나 된다.
걸을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해지면서 알리 씨는 매일 병실에서 엘리베이터까지 걷는 연습을 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한국 좋아요. 사장님도 좋고, 친구들도 좋아요. 하지만 몸이 아프니까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밖에 안 나요. 고향에 돌아가면 열심히 살아서 도움받은 사장님과 친구들에게 꼭 보답하고 싶어요."
김봄이기자 bo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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