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우리 시조로 푼 한시] 手執三稜杖(수집삼릉장)

내가 언젠가는 삼릉장을 잡고 가서

흔히 '남자는 배짱, 여자는 절개'라는 말을 듣는다. 옛말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만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조용한 역사적인 일화도 심심찮게 만난다. '약속은 꼭 지킨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도 있고, '어디 사람이 떠나면 그만이지 약속은 무슨 놈의 약속' 하는 사람도 있기는 있었던 모양이다. 성현의 용재총화에 의하면 여말선초 양여공이 수집해 꾸민 서울의 전목이란 사람이 충주의 기녀 금란을 꾸짖어 호통치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듣자하니 네가 문득 단월승을 사랑하여

깊은 밤 역을 향해 밤마다 달려간다니

삼릉장 손에 쥐고 달려가 월악산 맹세 따지리라.

聞汝便憐斷月丞 夜深常向驛奔騰

문여편련단월승 야심상향역분등

何時手執三稜杖 歸問心期月嶽崩

하시수집삼릉장 귀문심기월악붕

[한자와 어구]

聞: 듣자니. 汝便: 네가 곧. 憐: 이웃 마을. 斷月丞: 단월승, 사람 이름. 夜深: 깊은 밤. 常: 항상. 向驛: 역을 향해. 奔騰: 달려가다. // 何時: 어느 때에. 手執: 손에 잡다. 三稜杖: 삼릉장, 죄인을 때리는 데 쓰던 세모진 방망이. 歸問: 돌아가 묻겠다. 心期: 마음의 약속. 月嶽崩: 월악산이 무너지다.

내가 언젠가는 삼릉장 잡고 가서(手執三稜杖)로 제목을 붙여본 칠언절구다. 시문 내적인 작자는 전목(全穆)이란 사람으로 돼 있으나,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의하면 유정(柳亭) 양여공(梁汝恭: 1378~1431)의 작품으로 알려진다.

유정이 들었던 이야기를 시화(詩化)한 작품으로 보인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듣자니 네가 문득 단월역 승을 사랑하여/ 깊은 밤 항상 역을 향해 달려간다 하니// 언제 내가 삼릉장(세모진 형장)을 잡고/ 돌아가 월악산 무너져도 마음은 변치 않는다던 맹세를 물어볼거나'라는 시상이다.

이 시제는 '삼릉장을 잡고 가서'로 번역된다. 전목이 충주 기생 금란을 사랑했다. 그가 서울로 떠나려 할 때 금란에게 "경솔히 몸을 허락하지 말라"했더니 금란은 "월악산이 무너질지라도 내 마음은 변치 않으리라"라고 했다. 뒤에 단월역 승(丞=관명)을 사랑했다는 말을 들은 전목이 경성에서 위 시문을 써서 금란에게 보낸다.

시인은 금란이 단월역 승을 사랑하여 밤마다 충주의 단월역을 달려간다는 말을 들었다. 언제 육모방망이를 들고 충주에 내려가 월악산이 변할지라도 금란의 마음만은 변치 않을 것이라는 그 맹세를 따질 것이라는 내용을 담는 시문이다.

유정 양여공(1378~1431)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대장군 양능길의 15대손이며 현령 양숙의 아들이다. 자는 경지이며 호는 유정이고 본관은 충주다.

1396년(태조 4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405년(태종 5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판사랑을 비롯하여 종사랑, 예문관검열, 승정원주서, 성균관주부를 역임했다. 문장에 능통하여 중시 때 이조정랑 김자가 그의 시권을 빼앗아 이름을 고쳐 써서 바정언지 제교에 올랐다가 이듬해에는 황주판관이 됐다.

1414년에 병조좌랑이 됐고 이어 저평현감을 거쳐 이듬해 좌도전운판관이 됐다. 이조좌랑, 성균관직강지제교, 예조정랑을 거쳐서 1418(세종즉위년) 병조정랑으로 재직 중 병사를 상왕인 태종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판서 박습등과 함께 장형을 받고 함안에 유배됐다.

그 후 청풍, 충주 등지로 유배되다가 1431년 충주에 있던 중 기생 예성화를 빼앗아 원한을 품은 유연생의 위조고발에 의해 반역을 음모하였다는 죄로 사형당했다. 시와 글씨에도 능했으며 지극한 효행으로 영의정에 증직되고 효자문을 세워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장희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시조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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