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밑줄 쫙∼ 대구 역사유물] <8>대구의 고인돌 잔혹사

일제 침탈에 할퀴고 건설 붐·산업화에 헐린 신천변 '고인돌 왕국'

1960년대까지만 해도 대구의 진천천, 욱수천, 동화천, 팔거천 등엔 대규모 고인돌 유적이 조성돼 있었다. 신천을 따라 펼쳐진 고인돌 유적지.
1960년대까지만 해도 대구의 진천천, 욱수천, 동화천, 팔거천 등엔 대규모 고인돌 유적이 조성돼 있었다. 신천을 따라 펼쳐진 고인돌 유적지.
상동 수성랜드에 조성해놓은 고인돌 유적.
상동 수성랜드에 조성해놓은 고인돌 유적.

영원, 불멸(不滅), 강함의 대명사인 돌은 인류가 문명의 수단으로 처음으로 주목한 재료다. 불사(不死)의 속성은 외경을 자아냈고 그 외경은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로 작용했다. 선사시대 돌을 기반으로 한 거석문화의 출현은 어떻게 보면 필연으로 귀결된다.

세계 거석 유적의 수작(秀作)으로 알려진 이스터섬의 모아 석상, 영국의 스톤헨지, 프랑스의 카르냑 열석(列石). 이 중 카르냑의 3천여 개 선돌은 동서로 4㎞에 걸쳐 있고 모아 석상의 큰 것은 무게가 자그마치 82t에 달한다. 누구든 유적 앞에 서면 그 장엄함에 압도되고 만다. 이런 유적들을 접하면서 이국적 신비감과 막연한 동경에 사로잡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 역사에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그 동경의 시선이 바로 우리 역사를 향해 있음을 금방 알게 된다. 유네스코 문화유산급 고인돌 유적을 소유했었던 대구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그러나 산업화 과정에서 보석 같던 거석문화들이 하나 둘 사라져갔다. 아니 우리 손으로 뽑아내고 발로 걷어차 버렸다는 표현이 맞을 듯싶다. 실용, 효용의 가치에 묻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대구의 고인돌 속으로 떠나보자.

◆한 때 대구에만 3천여 개 고인돌

기원전 10세기에 등장한 지석묘는 철기시대에 접어드는 1천 년 동안 인류 문화에 등장한 진객이다.

현재 지구엔 6만여 기의 고인돌이 존재하고 동북아시아에 절반 이상이 분포한다. 한반도에 약 4만여 기가 위치한다. 1973년에 발행된 '대구 시사' 1권에 따르면 대구지역에 수천 기의 고인돌이 있었다고 한다. 단순비교로 프랑스 카르냑의 열석과 비슷한 규모다. 이 정도면 가히 대구는 고인돌 왕국으로 불릴 만하다.

청동기 고인돌 유적 분포는 하천변 구릉지 입지를 가장 큰 특징으로 한다. 대구도 물론 이 범주 안에 들어간다. 신천유역의 파동 중동 상동 이천동 삼덕동 칠성동, 진천천 근처의 상인동 월성동 진천동, 욱수천 자락의 매호동 시지동 사월동이 그 예다. 그 밖에 팔거천(동천동), 동화천(동서변동)도 마찬가지다.

◆고인돌 첫 발굴지는 대구

대구의 고인돌은 일제강점기에 처음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1927년 일본인 학자 고이즈미(小泉顯夫)와 사와(澤俊一)에 의해 대봉동에서 고인돌 발굴의 첫 삽을 뜨게 된다. 이 연구를 통해 묘표석(墓標石)으로만 알고 있던 고인돌이 묘지, 경계석, 제의(祭儀) 장소는 물론 부족 간 화합의 공간으로 작용했음이 밝혀졌다.

현재 고인돌 유적과 관련하여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곳은 고창, 화순과 강화도다. 고창, 화순은 남방식을 대표하는 특성 외에 그 양(2만여 기)에서, 강화도는 북방식(탁자식)을 대표하는 특징에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고창, 화순, 강화 지역 고인돌은 2000년에 유네스코에도 정식 등록됐을 정도로 학술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한국의 선사문화가 세계문화유산의 반열에 오르고 그 가치를 인정받는 일은 당연히 환영받을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 박수와 환호 뒤편으로 아쉬움과 회한이 교차하는 이유는 대구가 일찍이 고인돌의 왕국이란 명성을 지키지 못한 채 모든 기록과 영광을 제 발로 걷어차 버렸기 때문이다.

◆읍성 밖 고인돌 행렬 장관

1910년 무렵 대구는 읍성을 중심으로 대구의 도심이 형성되었다. 물론 일제의 식민 수탈의 연장선상에서 계획된 일이다.

읍성 밖엔 민가와 상가가 있었고 조금만 벗어나면 외곽 대부분이 논밭이었다. 이 읍성, 촌락, 평야지대를 특징으로 하는 도시 원형은 20세기 초까지 대부분 그대로 남아있었다.

읍성문 밖 외곽으로 나서면 들판엔 고인돌의 대오(隊伍)가 장관을 이룬 것으로 알려졌다. 북문 쪽의 칠성동, 동문 바로 앞 동문동, 남문 밖의 이천동, 대봉동 일대엔 수백 기의 거석들이 무리를 지어 서 있었다. 신천을 따라 냉천, 파동, 중동 일대엔 지석묘가 행렬을 이루고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적 영감의 공간인 수성들에도 고인돌 열병식이 펼쳐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식민통치, 산업화 과정서 훼손

대구 고인돌의 수난이 시작된 것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7년 읍성을 철거한 일제는 대구를 근대적 시가로 재편하고 본격적인 식민 시장 침탈에 나서게 된다. 번화가엔 일인들이 상가를 형성하고 신작로가 뚫린 가로에는 일본 상품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제일 먼저 대봉동, 삼덕동 등 읍성 주변 고인돌이 헐려나갔다. 식민 착취에 열중한 일인들에게 식민지의 문화 유적은 자연석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일본 상인들이 점차 진출하면서 일인들 주택이 들어서고 숱한 고인돌이 정원석으로, 담장 초석으로 뜯겨간 것도 이 시기다.

거석문화 파손 2라운드는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일 뿐이다. 일제의 문화 침탈 외에 우리 손으로 저지른 고인돌 훼손도 정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우리 문화에 대한 가학(加虐)이 본격화 된 것은 1980년대. 대구 도심이 급속히 팽창하던 시기다. 주택 200만 호 건설 정책의 구호가 울려 퍼지고 부동산 열풍이 전국을 강타한 시기와 일치한다.

아파트 건설 붐이 불며 도심 외곽의 웬만한 농지들이 대부분 택지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지석묘가 굴착기의 삽날에, 기중기의 리프트에 들려 나갔다. 공단 조성이나 시가지 정비 같은 도시화, 산업화 과정에서도 수많은 유적이 헐려 나갔음은 물론이다.

지역 역사의 소중한 DNA들이 하나씩 지워질 때 지역 학계와 문화계 어디 하나 나서서 반(反) 문명을 지적하거나 거석 보존에 대한 문제 제기 한 번 없었던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 과정에서 고인돌 왕국이라는 타이틀도 날아가 버렸고 유네스코 문화유산의 영예도 같이 흩어져 버렸다.

3천 기가 넘던 고인돌은 동네 어귀에서 초라하게 자리를 지키거나 어느 권세가 정원석이나 초석으로 팔려나갔다. 그중 일부만 남아 그 흔적만 더듬을 뿐이다. 대구의 고인돌 잔혹사, 해도 너무했다.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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