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인권의 파괴력

역사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계기나 원인으로 급변하기도 한다. 동독과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소련의 지배를 정당화해준 '헬싱키 협정'(1975년 8월)이 오히려 소련 붕괴의 물꼬를 튼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협정을 먼저 제안한 것은 소련이었다. 그 목적은 독일의 분단을 포함해 2차 대전 후 새로 책정된 동구 공산국의 국경선을 서방으로부터 보장받는 것이었다.

이로써 소련은 자신과 '동구권 블록'이 더욱 단단한 껍질로 보호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협정문의 '인권 조항'에 기댄 자유화 운동이 소련 내부를 갉아먹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의 권리와 사상과 양심, 종교나 신념의 자유를 포함하는 근본적인 자유의 존중"을 명시한 이 조항은 소련에 동구권 국경선을 인정해 주는 대가로 서방이 요구한 것이다. 소련은 이 조항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강제력이 없어 대수롭지 않게 봤다.

하지만 사태는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1976년 모스크바에서 반체제 인사인 사하로프 박사의 지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헬싱키 협정 준수 추진 공공단체'라는 조직을 필두로 여러 '헬싱키 단체'가 동유럽 전체에 출현해 정부에 인권과 자유의 보장을 압박하고 나섰던 것이다. 소련의 안전을 지켜줄 것으로 믿었던 협정이 소련 통치의 반대를 정당화하는 기반이 된 것이다.

이에 소련 권력층이 얼마나 당황했는지는 주미 소련 대사를 지낸 거물급 외교관 아나톨리 도브리닌의 회고가 잘 말해 준다. "반체제 인사들은 '프라우다'에 실린 그 발표문을 공식 문서와 같은 비중으로 대했다. 이는 점차 반체제와 자유주의 운동의 선언문이 되어갔다. 소련 지도층으로서는 상상도 못 했던 총체적 진전이었다."

진보 성향 계간지 '창작과 비평'이 이번 봄호에 국내 진보 진영도 북한 인권 문제에 적극적인 자세를 지녀야 한다는 글을 실었다. 그동안 진보 진영이 북한 인권에 대해 침묵해 왔던 것에 비춰 매우 이례적이다. 이는 북한 주민의 인간다운 삶에도, 그리고 북한의 변화에도 전혀 도움이 안 된다. 헬싱키 협정이 보여주듯 인권의 강조는 공산 체제에 매우 위협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진보 진영도 북한 인권 개선에 힘을 보태야 한다. 누가 알겠는가, 그런 노력이 자유민주주의적 통일에 씨알이 될 수도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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