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56년 전 고아원생 돌봐준 '윤ㅇ희' 찾습니다"

일본 삿포르에서 보내온 편지…재일 교포 실업가 은헌기 씨 사연

1955년 고아원 대성원 시절.
1955년 고아원 대성원 시절.
대학졸업 때의 은헌기 씨.
대학졸업 때의 은헌기 씨.

18일 매일신문사 홈페이지 오피니언 코너에 한 통의 메일이 날아들었다.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 근처에 산다는 은헌기 씨(67. 일본명 타카히 사토시. 高陽 憲基)가 보낸 편지였다. 은 씨는 1955년에 수성국민학교에 입학했다고 했다. 그 때 은 씨는 고아원생이었다. 자기를 잘 보살펴 준 남매를 찾고 싶다는 사연을 전했다. 자신의 삶에 있어 한 가닥 힘과 용기가 되어준 그 남매의 한 마디를 잊지 못한다는 말도 함께였다. 은 씨는 다음날인 19일 직접 전화를 걸어 사연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직접 했다. 국가조찬기도회 해외 내빈 자격으로 다음달 5일 한국을 방문하는 길에 대구에 들르겠다는 은 씨의 사연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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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곳 일본 북해도는 눈이 많이도 내리고 있습니다. 한국의 대구의 날씨는 어떠한지요. 60년 전 저는 대구에서 국민학교를 다녔습니다. 아마 지금의 대구는 그때의 모습은 없을것입니다. 이국에서 오래 살면서 삶의 뒤안길을 되돌아 보고 싶어지는것은 아마 나이가 든 탓일 겁니다. 이 가운데 제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국민학교 시절의 친구을 꼭 찾아보고 싶어서 이렇게 편지와 함께 불편한 부탁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바쁘신 업무가운데 좋은 징검다리을 놓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사는 곳은 일본 북해도 삿포로 공항에서 가까운, 인구 460명의 팔래트 언덕(Pallete Village)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름다운 마을입니다. 저는 여기서 넒은 풀밭 가운데 무지개 같은 알록달록한 목장을 갖고 땀흘려 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언제인가 젖소들이 뛰노는 낙농공원목장과 정성들여 짜모은 하얀우유로 치즈를 만들며 목장 한 복판에 아담한 마을교회를 지어 신앙 안에서 돕고 살아가는 사회교육장소로 개방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전쟁 후 대구 봉덕동에 있었던 대성어린이집(대성고아원, 대성원)에서 자랐습니다. 철조망 울타리 안에서 오갈데가 없는 아이들이 모여 사는 작은 집이었습니다. 저의 기억에는 이런 게 아직 남아 있습니다.

'고아원 시설은 많은 것이 부족하였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 집도 방도 부족합니다. 큰 방에 50명 정도가 몇명씩 짝을지어 두 장의 담요를 가지고 차운 마루바닥에 한 장은 깔고, 한 장은 덮고서 방 한가운데 있는 자그만한 장작난로 열기에 의지한 채 추위를 견뎌야 했습니다. 어느날 새벽 주위가 웅성거렸습니다. 건너 편에 자고 있던 작은 아이가 간밤에 죽었습니다. 어제 낮 양지쪽에서 쭈그리고 않아 무엇인가 나무가지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그렸을까요. 보고 싶은 엄마의 얼굴, 어린 여자 동생이 걱정이 되어 그리고는 또 그리고 지운 그림들이 아니었을까요.'

이러한 기억들을 저는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대성원에서 수성국민학교(1955년 4월 입학)로 가는 길은 언제나 즐거운 길이면서도 가기 싫은 길이였습니다. 언제나 책도 연필도 공책도 모자란 채로 학교에 가서는 멍하니 앉았다 되돌아 오곤 했습니다. 학교 오가는 길에 어쩌다 공사장에서 주은 시멘트포대 종이를 작게 잘라 실로 꿰매면 저의 공책이 되기도 했습니다.

4학년 5반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4학년 때부터 남녀 구분을 지었지만 이 반은 학급을 만들고 남은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이 함께한 반이었습니다. 이 반에는 누나와 남동생이 함께 한 남매가 있었습니다. 기억이 희미합니다만 누나가 '윤O희'이며 동생이 '윤O웅'이었습니다. 가운데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누나는 둥근 얼굴에 눈이 커다라며 동생은 얼굴이 삐쭉한 키가 커다란 아이였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저의 책상 밑에는 누구가 가져다 두었는지 자그만한 꽁보리밥 도시락이 놓여 있었습니다. 언제나 점심시간이며 밖으로 나가 찬물을 한 배 가득히 마시고 들어오는 저의 모습을 보아온 친구 가족들의 고맙고 따스한 정성이 함께 담긴 도시락이었습니다. 어느날 고마우면서도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부끄러워하며 슬며시 자리를 비운 저의 책상 밑 빈도시락을 몰래 가져가는 이 누나의 뒷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저에게 자기의 일을 숨기면서 저를 가만히 지켜본 그 눈길은 고마운 정이 가득히 담긴 맑은 작은 옹달샘과 같았습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 가는 길은 저와 남매 셋이었습니다. 셋이서 걷고 뛰고 깔깔거리며 앞서고 뒤서면서 용두방천 징검다리를 건너 효성여자대학 길목에서 헤어지곤 했습니다. 헤어지게 되면 언덕을 넘어 걸어 가는 둘이의 뒷모습을 우둑커니 보다가 저의 갈 길을 걷곤 하였습니다.

여름 방학이 시작될 때였습니다. 학교에서 가정으로 보내는 통신부를 받았습니다. 이 봉투는 아이들이 볼수 없도록 풀로 단단히 발라져 있었습니다. 이날은 셋이서 용두방천 흐르는 물 가운데의 돌 위에 걸터앉아 발로 물장구를 치면서 누구가 먼저 통신부 열어보자라고 제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누나는 저의 통신부를 가만히 보면서 "헌기 너는 공부를 많이 해야해"라는 잔잔한 목소리로 말하여 준 기억이 납니다.

이후 저는 미국 메노나이트 교회 선교재단이 지원, 운영하는 메노나이트 직업학교에서 중고등학교 과정의 기술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일들이었습니다.

이제 6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 많은 세월가운데 지금은 이국에서 국적도 이름도 바뀐 사람으로서 자기의 길을 조용조용 걸으면서 인생을 정리할 시기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들에게 언제나 우리가 가진 재산이나 지식, 기술, 사회적인 활동은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용되어져야 하는 도구다. 언제인가 이 모든 도구들을 다음 사람들이 잘 사용할수 있도록 정리하고 다듬어 두면서 이 모든것들을 선한 일에 사용할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3월 5일부터 10일까지 한국을 방문합니다. 대한민국조찬기도회에 해외내빈으로 초대를 받았습니다. 이 기간에 대구를 방문하려 합니다. 이 때 매일신문사에 들려 국민학교 때 도시락을 가만히 책상밑에 두어준 친구 이야기를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그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 이제 손자, 손녀를 본 활머니와 활아버지들이겠지만 좋은 식사라도 대접하면서 못한 고마운 인사를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고 자랑스럽게 하고 싶습니다.

'헌기 너 공부 열심히 해야해.' 그 말의 뜻이 여기 맑은 물이 흘러가듯이 너의 인생이 진실되고 힘차게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었다는것을 이제야 겨우 알 것 같습니다. 저는 그 누나가 이야기 한대로 연세대학교 총장상, 일본 문수상상은 물론 각종 자격증과 여러 곳으로부터 감사장 등을 받았습니다. 그걸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아마 그 누나는 "헌기 너 정말 잘 했네"라고 좋아 할 것입니다.

저는 많은 분들에게 많은 사랑의 빚을 진 작은 사람에 불과합니다. 가능하시다면 그 옛날 국민학교 시절에 배고파 하는 저에게 도시락을 몰래 책상밑에 가져다준 마음씨 고왔던 친구를 만날수 있도록 징검다리를 놓아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4년 2월 18일. 은헌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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