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일본의 반유대주의

반(反)유대주의 역사에서 흥미로운 것은 일본이다. 일본은 반유대주의가 생겨날 역사적 배경이나 현실적 토양이 없었지만 나치가 출현하기 이전부터 반유대주의가 형성돼 급속히 퍼져 나갔다. 1938년 도쿄에서 열린 국가주의자들의 반유대주의 선전전이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이나, 유명한 극우 언론인 도쿠도미 소호(德富蘇峰)가 "일본만이 세계의 모델, 표준, 모범이 될 수 있다"는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데 반유대주의를 이용했던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유대인 없는 반유대주의'의 목적은 유대인 말살이 아니었다.(유대인이 없으니 말살할 유대인도 없었다) 그것은 도쿠도미가 보여주듯 자유주의와 마르크시즘 같은 '위험한' 서양 사상을 차단하고 '일본 정신'을 보호'고양하기 위한 도구였다. 특히 러시아 혁명을 이끈 볼셰비키 지도자 상당수가 유대인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던 탓에 '반유대주의'는 위험 사상을 막는 수단으로 국가주의자들에게 큰 호소력을 발휘했다.

일본에서 반유대주의가 힘을 받을 수 있었던 데는 일본인의 정신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던 불교 승려들의 공헌(?)도 컸다. 대표적 인물이 선(禪)을 서양에 전파한 야스타니 하쿠운(安谷白雲)이다. 그는 신자들에게 "유대인의 선전과 전략을 철저히 좌절시켜야 한다. 우리는 자유와 평등을 옹호하는 그들의 사악한 사상에 담긴 오류를 명백히 지적해야 한다"고 설법(說法)했다.

이 같은 일본 반유대주의의 특징을 미국의 일본문학 연구자인 데이비드 굿맨은 저서 '일본인 마음속의 유대인'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일본의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을 박해하지도 않았고, 전시 이데올로기의 핵심 사항도 아니었다. 하지만 반유대주의는 일본인들이 전쟁을 바라보는 방식에 영향을 끼쳤고, 일본 정부는 국내 전선에서 반대 의견을 침묵시키고 이데올로기적 순종을 강요하는 데 반유대주의를 이용했다."

얼마 전 일본 도쿄 시립도서관 31곳에서 2차 대전 당시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의 일기와 나치의 유대인 대량 학살 관련 서적이 심하게 손상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아직 범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극우주의자들의 소행이란 추측이다. 아베의 '막가파식' 우회전에 맞춰 반유대주의가 다시 고개를 드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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