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치는 아주 못 생긴 생선 이름이다. 생김새가 아주 심청(심술) 궂게 생겨 강원도 사람들은 심퉁이라고 부른다. 동해안 중에서도 강릉 속초 거진 앞바다에서 주로 잡히는 어종으로 눈이 펄펄 날리는 겨울이 제철이다. 하도 못 생겨 옛날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요즘은 자연산 생선이 귀해지면서 찾는 이가 많아져 값도 엄청 올랐다. 못난이도 연예인이 되는 세상이니 사람 팔자나 생선 팔자나 모두가 세월과 팔자 나름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다니는 별난 사람들은 첫눈이 내리는 날 강릉 중앙시장의 도치요리를 먹으러 다닌다고 한다. 그들은 뉴스에 눈 소식이 들리기만 하면 뽕도 따고 임도 볼 겸 새벽 기차를 타고 강원도로 달려간다는 것이다. 새벽 6시 15분 출발하는 동대구 발 강릉 행 열차표를 끊으면 그것이 바로 설국(雪國)으로 들어가는 입장권이다.
열차를 타고 첫눈을 만나러 가는 사람들은 나이에 관계없이 여자는 유리 구두를 신은 백설 공주이며 남자는 공주가 잃어버린 구두 한 짝을 손에 들고 있는 왕자나 다름없다. 모두가 엷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차창 밖을 내다본다. 밤새 눈이 내려 창밖은 그야말로 백색나라이다.
"왜 첫눈이 오는 날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일까./ 아마 그건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이 오기를 기다리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한때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있다./(중략) 그런 약속이 없어지면서 나는 늙기 시작했다./ 약속은 없지만 지금도 첫눈이 오면/ 누구를 만나고 싶어 서성거린다./ 첫눈이 오는 날 만나고 싶은 사람,/ 단 한 사람만 있었으면 좋겠다."(정호승의 시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중에서)
추억도 늙는 것인가. '첫눈 오는 날 새벽 기차타고 강릉가자'고 아무리 소리를 질러 봐도 주변의 반응이 시무룩하다. 그리움이란 기능이 마비된 장애자들인가. 피차 백수인 처지에 잠자고 있는 그리움과 추억을 일깨워 "오냐"하고 나서야 할 텐데 가랑이 사이에 꽁지를 감추고만 있다. 그래서 열차 여행은 포기하고 자동차 여행으로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강원도 여행 중에 도치 요리를 먹어 보는 것을 비중 있는 목표로 잡았지만 실현 가능성은 별로였다. 도반들은 하루 한 끼쯤은 길거리에서 라면으로 때워도 불평하지 않지만 어시장에서의 생선 구입은 최고가 아니면 싫어하는 오랜 습성에 젖어 있었다. "도치국으로 점심을 때우자"고 말하면 "우리가 그걸 먹으려고 불원천리 달려왔냐"고 대들 것은 불을 본 듯 뻔한 일이다.
강원도 여행 이튿날 통일전망대로 올라가는 도중에 제법 괜찮은 어시장을 둘러보기로 했다. 속초와 백도항을 지나 가진항으로 들어섰다. 부두 주변에선 그물을 건져온 어선들마다 고기를 떼어내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부부 어부가 몇 마리 걸려 있지 않은 고기들을 향해 욕을 퍼붓고 있었다. 밤새 쳐둔 그물에 '왜 이것밖에 걸려들지 않았느냐'는 원망이었다.
"이게 무슨 고깁니까." "도치요. 빌어먹을 놈들." "국 끓여 먹게 몇 마리 파세요." "암놈 한 마리 만원만 주세요. 수놈 한 마리는 서비스요." 얼마나 반갑든지 얼른 받아 챙기고 도치찌개 끓이는 방법을 수첩에 급하게 받아 적었다. 어시장 고무다라이에 들어 있는 암놈은 삼 만원인데 반의 반값으로 생선을 확보했으니 소원의 절반은 이룬 셈이다.
도치요리를 할 땐 우선 냄비에 물을 팔팔 끓인 다음 배를 갈라 알을 끄집어내야 한다. 알의 양이 살코기보다 많다. 손질해둔 도치는 끓는 물을 부어 튀겨 낸다. 다시 한 번 살짝 삶아 한 입 크기로 썰면 도치회가 된다. 도치는 물렁뼈 생선이어서 식감이 아주 독특하다.
도치찌개는 생선을 알맞게 자른 다음 묵은지 한 포기를 쑹덩쑹덩 썰어 넣고 김치 국물을 적당하게 붓는다. 초벌 끓인 다음 물 뺀 알을 넣고 대파, 청양고추, 마늘 다진 것을 넣고 천일염으로 간을 한다. 맛 간장, 국 간장, 매실원액을 조금씩 첨가하면 감칠맛이 난다.
도치찌개를 조리할 때 물을 조금 더 부으면 해장국이 되고 물을 아주 많이 부으면 도치가 장화 신고 건너간 도치 장화 탕이 된다. 도치 해장국을 먹을 때 조심해야 할 것이 딱 한 가지가 있다. 속풀이로 마신 해장술에 발등을 찍히면 아버지도 못 알아 볼 때도 있다. 도치는 고향 사투리로 도끼(ax)다.
이번 강릉 나들이는 도치를 핑계로 댄 첫눈 추억여행이었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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