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쓴 늙은 중은 홍월초라는 중인바 조선총독이 내 수양아들이오. 이 글을 소지하고 있는 중은 바로 내 손자라, 이 아이의 신원은 나 홍월초가 보증하는 바이니 지체없이 통과시켜 경기도 양주 봉원사로 보내주기 바라오. 만에 하나라도 이 아이를 지체시켜 내가 도모하는 일에 차질이 생기면 총독에게 알려 엄히 추궁할 것인즉 이 점 각별히 유념토록 하시오."
금강산 유점사 주지 스님 심부름으로 홍월초(洪月初) 스님을 만나러 가던 월초 스님의 손상 좌인 운허 스님이 일본 경찰 형사의 검문에 걸렸을 때 내보인 편지글이다. 이 편지로 검문을 무사 통과한 운허 스님은 독립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며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격정으로 눈물 흘리며 우국에 애태우기도 했다. 그러나 월초 스님의 가르침으로 수행에 더욱 정진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고 한다.
월초 스님은 1906년 불교의 연구와 교육을 위해 조직된 불교연구회 대표를 맡았는데 대구서 국채보상운동이 벌어지자 1907년 오늘 연구회 승려 150여 명과 동참을 결의, 일본 빚 갚는데 스님들 참여를 유도했다. 연구회는 1904년 전국 사찰과 승려를 관리하던 사사관리서(寺社管理署)가 폐지되면서 봉원사 이보담(李寶潭) 스님 등과 원흥사(元興寺)에 설립했으며 초대 회장에 홍월초, 2대 회장은 이보담 스님이 맡았다. 연구회는 1906년 5월 원흥사에 현 동국대학교 기반이 된 명진학교(明進學校)를 개교하는 등 많은 활동을 벌이다 1908년 3월 해체됐다.
정인열 서울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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