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도 더 된 일이다. 레지던트 1년차 때 당시 근무하던 대학병원이 허위진단서 사건으로 떠들썩한 적이 있었다. 당시엔 개인택시 면허를 함부로 매매'양도할 수 없었다. 다만 만성질환이 있는 경우에만 예외를 인정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당뇨병 및 고혈압' 진단서가 일정 기간 대학병원에서 발부됐고, 이를 근거로 개인택시 기사들이 면허를 사고팔자 경찰 조사가 벌어졌다. 진단서를 발부한 의사는 당시 함께 수련 중이던 의사였다.
조사 결과, 병원 내 사정을 잘 아는 한 직원이 의사들의 글씨를 흉내내 진단서를 작성하고, 도장까지 파서 허위 진단서를 발급해주고 돈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연루된 의사들은 영문도 모른 채 단지 자기 이름의 진단서가 발부됐다는 이유만으로 조사를 받았다. 물론 사건 전모가 밝혀져 혐의는 모두 벗었다. 다행히 필자는 조사 대상에서 빠져있었다.
이유는 내 글씨를 쉽게 흉내를 낼 수 없엇던 탓에 브로커의 범행 대상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필자는 스스로 '달필'(達筆)이라고 생각하는데, 남들은 '악필'(惡筆)이라고 불렀다.
진료 중에 다른 의사들이 쓴 소견서나 처방전을 종종 보는데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알아보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유난히 처방전, 소견서 등에는 갈겨쓴 글씨가 많다.
얼마 전 미국의학협회에서 '미국에서 의사의 악필 때문에 사망하는 환자가 매년 7천 명에 이르며, 이로 인해 질병을 얻거나 다치는 경우는 평균 150만 건에 달한다. 처방전에 약사가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쓰기 때문에 잘못된 약을 내주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표했다. 물론 알파벳과 한글은 구조적으로 달라 우리나라 상황도 비슷할 것으로 속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우리나라도 어느 정도 의사의 악필과 관련된 문제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처구니없는 의료사고를 막기 위해서라도 의사들이 명필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남들이 알아볼 정도로 또박또박 쓸 필요는 있겠다.
하지만 다행히 거의 대부분 병'의원은 전자처방시스템을 도입, 처방전이나 의료기록이 컴퓨터로 작성된다. 그런데 타이핑을 잘못 하거나 마우스를 잘못 클릭해 엉뚱한 검사나 약물이 처방되는 새로운 위험도 생겨났다.
야구에서 마운드에 선 투수는 행여 실투를 할까봐 타자마다 특성을 잘 파악해 신중하게 공을 던진다. 의사들도 마찬가지다. 진료실에서 환자를 대할 때 신중하게 판단하고 처방하고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나저나 의료기록과 처방 모두 전자 시스템으로 바뀐 세상에서는 더 이상 필자의 달필을 발휘할 기회가 없어서 그 점은 좀 아쉽다.
김성호 대구파티마병원 신장내과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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