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서각의 시와 함께] 막창 같은, 붉은 신호등-고희림(1960~ )

사후에도

그 존재가 확실한 용도의

돼지나 소 막창 같은, 저 붉은

붉은 신호등 앞에서

멈추고 멈추어 온 나는 지금도 멈춘다

저 붉은 신호등의 붉은 색은 다만

나를 잠깐 멈추게 하는 가식인가

내가 진짜 멈추는 이유는

신호등의 저 붉은 색이

질서를 아름답게 만든다는 환상 때문인가

 

-시집 『평화의 속도』, 시와반시사, 2003.

이 시를 읽으며 '멍게'가 느닷없이 떠올랐다. 멍게는 원래 동물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움직이지 않아도 주위에서 먹이를 구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뇌가 퇴화하여 식물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요즘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는 독립영화 '또 하나의 약속'에서는 자신의 안녕과 이득을 위해서 영혼을 팔아버린 사람들, 옳고 그름에 대한 비판 없이 권력이 시키면 못 하는 일이 없는 사람들을 멍게에 비유하고 있다.

이 시의 화자는 붉은 신호등만 보면 아무 생각 없이 멈추어 서는 자신의 태도에 대한 성찰이다. 현대사회는 인간을 획일화된 틀 안에 가두고 사회가 정한 규범에 따라 기계적으로 움직이게 한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진다거나 성찰의 시간을 가질 겨를이 없이 그저 습관적으로 행동한다.

화자는 붉은 신호등이 자신을 잠시 멈추게 하는 가식인가, 혹은 붉은 신호등 앞에 멈춰서는 자신의 행동이 질서를 아름답게 하기 위함인가, 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호등을 '사후에도 그 용도가 확실한 소 막창'에 비유함으로써 그 해답을 제시한다. 막창은 사람의 식탁에서 사라진다. 우리는 주위에서 자기가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르고 습관적으로 잘못을 반복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시인은 아무런 비판 의식 없이 멍게와 같이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정신이 번쩍 나도록 죽비를 내려치고 있는 것이다.

시인 kweon51@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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