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 시대엔 기마전(騎馬戰)보다 보병이 전투의 주력이었기 때문에 2, 3m 도랑(환호)만으로 적을 저지하는 데 큰 효과가 있었습니다."
동천동 환호유적 조사 당시 조사위원으로 발굴에 참여했던 대구한의대 김세기 교수로부터 발굴 과정 후일담을 들어봤다.
◆동천동 세력과 무력 충돌을 빚은 곳은?=대구 지역 대부분 하천변엔 청동기 마을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신천변, 화원, 월배, 다사, 불로동, 만촌동, 평리'내당'비산동, 경산 임당동 등 거의 전 지역이 망라된다.
군사적 갈등관계가 있었던 지역을 특정할 수 없지만 아마 금호강을 경계로 한 팔달동이나 신천변 세력들이 1차로 대립관계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동천동 환호 유적 발굴 과정서 느낀 점은=대구는 청동기 문화 벨트라고 부를 정도로 다양한 유물, 유적들이 발굴되고 있다. 환호 유적이 확인되었다는 것은 마을 전체의 윤곽, 외형이 밝혀졌음을 뜻하고 이는 생활사 전반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窓)이 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분이나 묘제, 토기, 석기도 중요하지만, 생활사 유적도 어느 유적 못지않게 가치가 있다.
◆대구 다른 지역에도 환호가 발굴된 적이 있나=월성지구나 신서동 등에서 부분적으로 환호가 확인된 적이 있다. 다 규모가 작고 외형이 흐릿해 '확인' 정도에만 그치는 실정이다. 동천동 환호는 마을 전체가 도랑에 둘러쌓인 형태로 출입구까지 확인된 상태다. 단정할 수 없지만 일본 규슈의 요시노가리(吉野ヶ里) 환호 유적처럼 마을 입구에 다리까지 설치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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