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대전시 유성구 장대동에서 선사시대 유적이 발굴됐다. 갑천(甲川)이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구릉. 정상 부근에서 청동기 분묘와 원삼국 시대 집터 등 15기의 유구가 확인됐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집터 대부분은 불탄 상태였고 바닥엔 깨진 토기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주변에 타다만 곡식들이 당시의 참상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른바 '약탈 유적'이다. 청동기 시대 수탈 흔적은 전국적인 현상이다. 대구에서도 방화로 보이는 집터 흔적이 보이고 진주에서는 화살에 희생된 두개골이 발견되기도 했다.
모두 계급이 생겨난 후에 벌어진 일이다. 고대 사회에서 위계, 서열의 등장은 갈등이 생겼을 때 문제 해결방식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창과 동검이 대화와 설득의 자리를 대신하고 족장의 위세와 완력이 부족사회의 정의로 자리 잡았다. 개인적으로는 계급, 신분적 차별이, 집단적으로는 약탈, 정복 전쟁이 마침내 시작되었다.
정복 전쟁이 본격화하면서 부족들은 구릉지대로 주거지를 옮기고 본격 방어 시설을 구축하게 된다. 소극적으로는 망루나 목책(木柵)을 쌓기도 하지만 전쟁이 치열했던 곳에는 마을 전체를 해자(垓字)로 둘러쌓기도 했다. 이른바 환호(環濠)시설이다. 청동기 시대 마을의 요새가 있었던 동천동으로 떠나보자.
◆잉여 생산물 출현 후 계급 등장=청동기 집터 유적의 특징 중 하나는 저장 공간의 등장. 초기, 중기에는 주로 집안에 토기나 구덩이를 묻고 곡식이나 음식을 저장했다. 중기 이후에는 집밖에 저장 공간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는 저장할 곡식이 늘어나 실내 공간의 감당 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잉여 생산물이 생겨난 것이다.
청동기 시대 생산물의 증가 원인은 조, 피, 수수 등 작물이 다양해진 것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벼농사의 본격화와 관련이 있다. 청동기시대 벼농사는 가히 농업혁명이라 불릴 만큼 신석기 채집경제와는 규모나 생산량, 노동 형태에서 질적으로 달랐다. 이 시기에 들어와서야 인류는 식량을 자급할 수 있었다. 그늘도 드리웠다. 잉여 생산물은 가진 자와 없는 자를 구분하고 둘 사이를 계급으로 갈라놓았다.
◆동천동 택지서 환호 유적 발굴=1997년 대구시 동천동 칠곡 3택지 청동기 유적 발굴 현장에서 작은 도랑(환호) 흔적이 드러났다. 환호는 마을을 방어하려고 주변에 만든 구(溝). 환호의 등장은 당시 거주인들에게 마을의 '안'과 '밖'이라는 경계가 있었음을 나타내고 대외적으로 '우리'와 '남'이라는 구분이 뚜렷해졌음을 뜻한다.
동천동 유적에서도 청동기 시대 계급과 관련한 일반적인 유적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곳에선 20기의 고상가옥(高床家屋)이 발견 됐는데 1칸에서 10칸까지 최고 10배까지 규모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큰 가옥과 작은 가옥 거주 집단 사이에는 신분적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역사학자 김현숙 씨는 '역사 속의 대구, 대구 사람들'이라는 책에서 '다른 지역에서는 환호의 안과 밖에 별도 마을이 있는 곳도 보인다'며 '상대적으로 안전한 안쪽엔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바깥쪽엔 약자들이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측했다.
◆환호는 군사적으로 유용한 시설=환호 유적의 또 하나의 특징은 군사적 성격. 이는 환호가 경계의 구획이나 맹수 방비라는 소극적 성격을 넘어서 전투적 용도로 기능했다는 시각이다. 상당수 유적지에서 목책(木柵)을 같이 설치하거나 여러 겹으로 환호를 만든 데에서 알 수 있다.
서울 풍납토성에서는 3중으로 두른 환호가, 청원 쌍청리 유적에선 일곱 겹의 환호가 발견되기도 했다. 양산 평산리에서는 환호를 따라서 도랑 안쪽엔 빽빽한 목책이 박혀 있는 것이 확인됐다.
대구 한의대학교 김세기(관광레저학과) 교수는 "환호는 대부분 평지나 구릉에 있기 때문에 대규모 전투에는 효과적이지 못하다"며 "환호의 안과 밖에 토루나 목책을 결합하여 방어력을 극대화했다"고 분석했다. 영남문화재연구원의 박승규 원장도 "조사 당시에 환호의 깊이가 1m, 폭도 2m가 넘었다"며 "이 정도면 당시에 방어 시설로써 충분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부족 간 긴장관계가 환호 등장 배경=아직 대구에서 환호 유적은 드문 편이다. 동천동 유적은 도랑 환호에 목책까지 두른 '중무장형'이다.
대구 북부 부족 마을이 요새에 집착한 이유를 전문가들은 이곳이 지정학적으로 항상 긴장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 동천동이 자리 잡은 칠곡은 당시 거대 집단을 이루었던 신천변 세력과 진천천변 세력의 틈에서 항상 긴장할 수밖에 없는 위치라는 것이다.
즉 금호강을 사이에 두고 남쪽으로는 중동, 대봉동, 상동의 부족들과 서쪽으로는 월배쪽 부족들과 대립했다. 함지산을 사이에 두고 동서변쪽 부족들도 위협이었다. 동천동 환호유적은 3천 년 전 칠곡의 한 부족이 주변 집단의 침략과 약탈에서 벗어나려고 고민한 흔적이 그대로 나타나 있는 곳이다. 후대까지 그 흔적을 남겨 현장을 보존했으니 '요새'로써 기능은 다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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