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맞는 사람과 함께 일하면 좋겠지만 조직 생활이란 결코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저 사람 아니면 다 괜찮다' 고 생각한 그 사람과 같은 팀으로 발령이 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직장에 미운 선배가 있으면 "윗사람이 다 그렇지"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얄미운 후배는 어떻게 대처할 도리가 없다. 별것도 아닌 일로 혼내면 말하는 본인만 '쪼잔한 선배'로 전락하고, 원래 성격이 그렇겠거니 하고 넘어가면 참는 사람만 바보가 된다. 취재원의 신변 보호를 위해 인터뷰는 철저하게 익명으로 진행됐다. 최소한 이런 후배는 되지 말자.
◆ 온갖 애교는 혼자서, 일은 몰라요 (제보자 : ○○기업 홍보팀 30대 여자 정 대리)
정 대리는 주변에서 "성격 좋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빠른 일 처리는 물론 회식 자리에서 술도 잘 마시고, 후배들에게 밥도 잘사는 '쿨한 선배'다. 하지만 3년 전 입사한 막내 A(24'여)는 이렇게 성격 좋은 정 대리 속을 뒤집는 유일한 인물이다. 맡은 업무가 외국인을 대하는 일이기 때문에 A는 영어를 잘하는 편이다. 문제는 A의 영어가 업무 시간 외에도 수시로 튀어나온다는 점이다. 단어에 영어를 섞어 쓰는 것은 애교로 봐줄 수 있지만 과장이 불렀는데 영어로 "why?(왜요?)"라고 대답하는 것은 분명 도를 넘어섰다. 이제는 외국어 영역이 일본어로 확장됐다.
'외국어 사태'는 그렇다고 치자. A는 종종 '막내의 역할'을 망각한다. 모름지기 막내라면 부서에 손님이 오면 먼저 일어나 커피를 타고, 부서 탕비실이 더러우면 청소하고, 자기 책상 걸레질을 할 때 팀장 책상도 함께 닦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이것은 노동법에 나오지 않는 조직의 생리다. 하지만 A는 손님이 오면 모른 척하고 있다가 정 대리가 커피를 타면 "아~ 제가 하려고 했는데"라며 옆에 와서 천진난만한 토끼 표정을 짓고, 물수건으로 자기 책상만 가려 닦는다. 당연히 탕비실 청소도, 팀장 책상 청소도 '쿨한' 정 대리 몫이다. 얼마 전 10명 넘는 부서원들의 연말정산 업무도 정 대리 혼자 처리했다. A는 "선배, 다음부터 꼭 제가 할게요~"라며 미소를 날렸지만 정 대리는 이 말을 믿지 않는다.
정 대리가 묵묵히 잡일을 해도 상사들의 귀여움은 A가 독차지한다. 회식 자리에서 팀장과 '셀카'를 찍으며 애교를 떨면 "허허~그래 그래~"하고 넘어간다. 싹싹하고 예쁜 여직원을 싫어하는 상사는 드물다. 회식 자리에서 A는 잘 보여야 되는 상사가 누군지 정확히 아는 똑똑한 여성이지만, 일 처리를 할 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가 된다. A는 오늘도 정 대리에게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선배, 패밀리레스토랑 가고 싶어용~!" 선배는 지갑 열고 밥이나 사라는 말이다. 오늘도 정 대리 속은 타들어간다.
◆ "나만 잘되면 되지 뭐" 자기밖에 몰라(제보자 : 30대 군인 김모 씨)
상명하복이 확실한 군대 조직에도 '밉상 후배'는 존재한다. 김 씨의 2년 후배 B(31)는 일을 잘한다. 지각하지 않고, 자기가 맡은 일은 완벽하게 해내는 스타일이라 일로 흠잡을 데가 없다. 하지만 야망이 불타오르는 후배는 무섭다. B는 좋은 보직이나 진급에 유리한 일이 있으면 절대 놓치지 않고, 손해 보는 일은 죽어도 안 한다. 또 선배에게 지나치게 싹싹하지만 후배한테 인색하다. 자기가 일하며 쌓은 노하우는 절대 알려주지 않는다. "그냥 이렇게 해봐"하고 두루뭉술하게 알려준다. 관사에 사는 김 씨는 지난 3년간 단 한 번도 B의 방에 가보지 못했다. B의 방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여태 여러 동료의 방을 옮겨다니며 술을 마셨지만 B는 "술 마시면 내 방 더러워진다"며 절대 자기 방을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B의 본색이 드러나는 결정적인 일이 터졌다. 몇 달 전 경북의 한 도시에 좋은 '보직'이 나왔다. 업무량은 약간 많지만 진급에 유리하고, 여러모로 직장 생활에 도움이 되는 자리였다. B는 이 보직에 지원할 수 있는 자격 자체가 미달이었다. 하지만 평소 고위직 상사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던 B의 움직임이 수상했다. 총 5명을 뽑는 자리였는데 상사의 '빽'을 등에 업고 자격 요건이 안되는 B가 막무가내로 지원한 것이다. 대신 상사는 이 보직의 유력한 선정자였던 김 씨의 선배 한 명을 불렀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자네, 나중에 좋은 보직에 넣어줄 테니 이번에 지원하지 말게."
상사의 회유와 협박으로 그 선배는 결국 신청조차 하지 않았고, B를 포함해 총 5명이 신청하면서 자격 미달인 B는 자연스레 기회를 잡았다. 모든 부서가 이 사태를 아는데도 B는 기회를 놓친 선배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발령이 나자마자 그곳으로 떠났다. B가 일이라도 못했으면 책잡아서 혼내기라도 했을 텐데. 김 씨는 일 잘하고, 제 실속만 챙기는 후배가 성격 더러운 상사보다 더 밉다.
◆ "입에 모터 달렸니, 좀 조용히 해줘" (제보자 : 회사원, 30대 여자 박 대리)
박 대리의 직장 동료 C(32)는 말이 너~무 많다. 하나를 질문하면 질문 배경부터 파악해서 열 가지 답을 한다. C의 성격을 잘 아는 박 대리는 될 수 있으면 그에게 질문하지 않는 편이다. 그는 스스로 모든 분야의 '전문가'라고 생각한다. 축구와 야구 같은 대중 스포츠는 물론 문화와 정치, 경제, 패션 등 모든 분야에 능한 자칭 걸어다니는 '위키피디아'다.
박 대리는 소치 동계올림픽 기간이 곤욕스러웠다.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데시벨(dB)로 C가 피겨 스케이팅, 컬링 등 경기 결과를 실시간으로 중계했기 때문이다. 김연아 선수가 은메달을 딴 다음 날에는 러시아 선수들의 이름까지 줄줄 외며 갑자기 '해설위원'으로 변신해 열띤 설명을 했다.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말이다.
일이라도 잘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C는 혼자 하는 일에는 능하지만 협업에 약하다. 박 대리는 얼마 전 C와 함께 '팀 프로젝트'를 하다가 폭발하고 말았다. 일을 해보지도 않고 "이건 이래서 안 된다" "저건 저래서 안 된다"고 말로 훼방을 놓았기 때문이다. 일을 분배할 때는 항상 일감이 적은 것을 얍삽하게 골라갔고, "일 다했냐"고 물어보면 "아직…."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C는 행동보다 말이 앞서는 가벼운 남자였다. 일 때문에 C를 따끔하게 혼내려 하면 박 대리가 노처녀 히스테리 부리는 꼴이 된다. 사정을 모르는 다른 동료는 "왜 그래, 착한 C한테~ 열심히 하는데 예쁘게 봐줘"라며 오히려 박 대리를 나무란다.
얼마 전 박 대리는 지원군을 얻었다. 회사에서 성격 좋기로 소문난 한 직원이 C와 함께 일을 한 뒤 "못 해먹겠다"며 박 대리를 찾아왔다. C가 후임자에게 업무를 인수인계하며 일 처리를 깔끔하게 하지 않아 회계상 오류가 났고, 후임자인 이 직원만 부장에게 와장창 깨졌다. 찾아와서 무릎 꿇고 미안하다고 빌어도 모자랄 마당에 C는 "이제 내 손을 떠난 일"이라며 웃어넘기려 했다. 그날 박 대리는 씩씩거리는 그 직원과 함께 커피를 마시며 C의 실체에 대해 논했다. 그리고 이렇게 조언했다. "걔한테 말 걸지 마. 네가 다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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