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040 광장] 봄 산에는 진달래가 활짝 필 텐데

역시 여느 꽃보다도 먼저 매화가 꽃봉오리를 터뜨렸다. 과연 화형(花兄)답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 제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난 다정도 병인가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이조년이 말한 일지춘심(一枝春心)으로 세상이 울긋불긋하다. 북풍한설을 이겨내고 암향(暗香)을 꽃피운 매화의 고혹적인 자태는 언제나 사람에게 미적 상상력과 정신적 교훈을 안겨준다.

개나리도 제 차례를 잊지 않고 아름다움을 뽐낼 것이다. 신천 강변 가득한 개나리들에는 연노란 새순이 돋아나고 있다. '개나리 우물가에 사랑 찾는 개나리 처녀∼.' 잎보다 먼저 꽃을 피워내는 개나리의 새순들은 사람의 마음에도 봄바람의 따스한 훈풍으로 스며든다.

곧 진달래들도 겨우내 기다려온 때를 놓치지 않고 화들짝 놀란 듯 만개를 할 터이다. 오죽하면 김동환이 노랫말을 짓고 김동진이 곡을 붙여 진달래를 상찬했을까.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진달래 피는 곳에 내 마음도 피어, 건너 마을 젊은 처자 꽃 따러 오거든, 꽃만 말고 이 마음도 함께 따 가주∼.'

그러나 봄은 왔건만 사람들의 노랫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우리 민족은 태고 이래 유난히 가무(歌舞)를 좋아해 온 사람들인데, 이 좋은 봄날에 왜들 노래를 부르지 않는 것일까. 봄바람은 마치 우리에게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는구나' 하고 탄식을 하는 것만 같다.

매화, 개나리, 진달래는 춘신(春信)의 상징이다. 꽃들은 봄이 왔다는 자연의 순리를 말해준다. 따라서 상징은 세상일을 해석하는 방법으로도 유력하다. 며칠 전 발생한 세 모녀 자살 사건도 그렇다. 세 모녀는 죽음으로써 작게는 허점투성이 복지 제도의 문제, 크게는 우리 사회의 공동체 정신 해체가 안고 있는 모순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었다. 그런 점에서 온 국민은 함께 그들의 명복을 빌어야 마땅하다.

왜 온 국민이 그런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하나? 그것은 대의 민주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 국민이 사회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권력을 정치인들에게 부여했기 때문이다. 세 모녀의 자살에 대한 법적 책임까지 정치인들이 져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정치적 책임은 당연히 그들에게 있는 법인데, 그들에게 권력을 위임한 주체가 바로 국민인 까닭이다.

하지만 우리 국민은 정치인들이 정치적 책임을 지는 경우를 별로 경험하지 못했다. 6'25 때 한강 유일의 다리였던 인도교 폭파 사건이 그 상징이다. 물론 근래 벌어지고 있는 기초자치단체 선거 정당 공천 논란도 그 사례의 한 가지일 뿐이다.

작년 기초자치단체 보궐선거 때 여당은 대통령 공약에 따라 공천을 하지 않았다. 야당은 공천을 했다. 그런데 올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당은 공천을 강행하고, 야당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정치인들이 이랬다저랬다 이익되는 길만 찾으니 국민의 정치 불신은 나날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런가 하면, 존속 살인 문제도 우리 사회의 모순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다. 서양 선진국들의 존속 살인 비율은 전체 살인 사건의 1∼2%에 머물지만, 동양 선진국인 우리나라는 무려 5%나 된다. 삼국시대 이래 2천 년 동안이나 효도 교육을 해온 우리나라가 그런 교육을 해오지 않은 서양 나라들에 비해 몇 배나 높은 존속 살인 국가가 된 데 대해 왜 정치인들은 아무 말이 없을까.

답은 자명하다. 국민이 묻지 않기 때문이다. 존속 살인 문제나 가난한 가족들의 집단 자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국민이 묻지 않는데, '머리 좋은' 정치인들이 묵묵부답인 것이야 당연한 일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정치인들은 정치 불신이 심할수록 좋다. 그러면 지역감정 투표 등으로 기성 정치인들의 권력 유지는 계속 손쉽기 때문이다.

겨울은 단색이지만 봄은 형형색색이다. 겨울에는 검은 옷 하나로 버틸 수 있지만 봄이 오면 철에 어울리는 색깔과 두께를 고민해야 한다. 그러므로 봄을 좋아하는 정치인은 별로 없다. 겨울에 섣불리 꽃을 피우는 진달래가 없는 것처럼, 국민이 요구하지 않는데 국민을 위한 정치에 매진할 정치인은 거의 없다. 봄노래 꽃노래를 부를 수 있는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는 국민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그것이 선거다.

정연지/화가 gogoyonj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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