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 때부터 냉전시대까지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가 첩보전에서 거둔 혁혁한 전과는 지금도 경탄을 자아낸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사상 최대의 전차전(戰車戰)으로 1943년 봄 독일과 소련의 탱크 2천여 대가 맞붙은 쿠르스크 전투에 앞서 소련은 독일의 작전계획서를 입수했다. 이를 바탕으로 소련은 독일이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병력을 재배치했다. 독일군의 목에 조용히 올가미를 건 것이다.
2차 대전이 끝난 직후 영국은 반소 감정이 높아 많은 협조자가 있었던 리투아니아와 에스토니아를 통해 공작원들을 소련으로 침투시키는 작전을 폈다. 공작원들은 주로 공중에서 침투했는데 소련은 낙하 장소와 시간은 물론 공작원의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 소련은 이들을 체포해 일부를 이중간첩으로 만들었다. 영국은 이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이뿐만 아니다. 스탈린의 김일성 남침 계획 승인, 소련의 원자폭탄 개발 등 역사의 흐름을 바꾼 굵직한 '사건'의 배후에는 항상 KGB가 있었다. 이러한 빛나는 승리의 원동력은 영국과 미국의 정보기관과 외교 부서에서 암약했던 영국 내 소련 첩보망, 일명 '케임브리지 5인방'(킴 필비, 앤서니 블런트, 존 케른크로스, 도널드 매클린, 가이 버지스, 모두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이다)이다. 위에서 든 KGB의 전과는 모두 이들이 훔쳐낸 정보의 결과물이다. 그래서 이들은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휴민트'(인적 정보)로 꼽힌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자발성과 그들에 대한 KGB의 세심한 관리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 간첩이 됐다. 그들은 당시 영국 최상위층의 일원으로, 부모 잘 만나 좋은 교육을 받고 좋은 직장에 취직해 인생을 즐기며 살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이 조국을 배반하고 간첩이 된 것은 '자본주의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이념 때문이었다. 그들은 소련을 돌아보고 소련의 비참한 현실에 실망하기도 했지만 끝까지 소련을 위해 봉사했다.
이런 그들을 위해 KGB는 성심을 다했다. 위험한 정보를 무리하게 요구해 그들의 정체가 노출될 위험을 강요하지 않았다. 또한 KGB는 이들을 대할 때 최대한 예의를 갖췄고 모스크바의 지시에 무조건 따를 것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들에게 엄청난 액수의 연금을 지급했지만 돈 때문에 그런 일을 하는 것을 가장 큰 모독으로 여기는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매우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이런 성공적인 휴민트 구축의 역사를 보면서 과연 우리 정보기관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탄식이 저절로 나온다. 전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 씨 간첩 사건 재판 과정에서 보여준 국정원의 헛발질은 휴민트 부재의 한심한 현실뿐만 아니라 그나마 휴민트라고 믿었던 인사에게 뒤통수를 맞은 국정원의 무능을 여실히 폭로하고 있다. 유 씨의 간첩 행위 증거라고 재판부에 제출한 중국 측 문서가 가짜였다는 사실, 그리고 이에 대한 국정원의 '우리도 속았다"는 변명은 한 편의 블랙코미디이다.
특히 '우리도 속았다'는 고백은 사실이면 사실인 대로 거짓이면 거짓인 대로 심각한 우려를 낳는다. 속은 것이 사실이라면 국정원의 판단력에 큰 장애가 있다는 것이고, 거짓이라면 국민을 상대로 두 번씩이나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우선 속았다는 것은 정보원이 암까마귀인지 수까마귀인지 모른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건넨 정보의 사실 여부를 판단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총체적 '정보 실패'로 이어져 국가 안보에 치명적인 위험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두 번째로 거짓이라면 유 씨를 간첩으로 '만들기 위해' 가짜 서류인 줄 알면서도 진짜인 것처럼 꾸민 데 이어 진짜로 꾸민 사실까지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증거로만 죄의 유무를 판단하는 우리 법치주의를 근본부터 부정하는 중대 범죄라는 점에서 이 역시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지금 국정원은 존폐의 기로에 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야당은 대공 수사권의 검'경 이관을 다시 꺼내고 있다. 그러나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진보 정권' 10년을 거치면서 붕괴된 대북(對北) 휴민트의 재건이란 문제 말이다. 사실 이번 사태의 근본적 원인은 제대로 된 휴민트의 부재에 있다. 그런 점에서 휴민트는 꼭 재건되어야 한다. 이는 매우 지난(至難)한 과제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케임브리지 5인방에게서 그 길을 찾을 수 있을 듯하다.
댓글 많은 뉴스
홍준표 대선 출마하나 "트럼프 상대 할 사람 나밖에 없다"
나경원 "'계엄해제 표결 불참'은 민주당 지지자들 탓…국회 포위했다"
홍준표, 尹에게 朴처럼 된다 이미 경고…"대구시장 그만두고 돕겠다"
언론이 감춘 진실…수상한 헌재 Vs. 민주당 국헌문란 [석민의News픽]
"한동훈 사살" 제보 받았다던 김어준…결국 경찰 고발 당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