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수필1] 아! 봄이런가

김유자(대구 남구 명덕로)

동면에 든 짐승처럼 겨우내 웅크리고 있다가 엊그제 예기치 않은 일로 열차를 탔다. 겨울 가뭄이 심했던 탓인지 차창 너머로 마른기침하듯 쿨럭이는 대지가 눈에 들어왔다. 물 마른 억새가 펄럭거리고 산비탈 빈 밭으로 드러난 속살에서 허연 비늘이 날렸다. 기차가 물가를 지날 때였다. 우수(雨水)에 풀린 실개천이 풀풀 날리는 억새 잎을 쓰다듬으며 어디론가 쏜살같이 달아나고 있었다.

아! 봄이런가. 덤덤하게 바라보던 바깥 풍경이 갑자기 달라 보였다. 이 순간 유독 빛을 발하고 있는 내 두 개의 흐릿한 눈동자로 세상의 봄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처럼 설레었다. 몸을 푼 개울물과 같이 물기가 도는 듯 감각의 문이 스르르 열렸다.

그다지 춥지 않은 겨울이었다. 눈도 비도 거의 볼 수 없었던 계절이었다.

하지만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이전과 다르지 않다. 허공에서 창백한 모습으로 겨울을 나던 나뭇가지에서도 희미하게나마 생명의 푸른 기운이 감돈다. 나무를 잠에서 깨우고 물을 쉼 없이 흐르게 하는 것은 대체 어떤 힘일까. 침묵의 바깥 세상과는 대조적으로 땅속 깊은 세계는 생명을 꽉 움켜쥔 채 해가 뜨고 별이 지는 일과 짐승들의 발걸음 소리와 순리를 따르는 일에 충실했으리라.

고통을 당해본 사람은 안다. 그것에 직면해 있을 때는 영원할 것 같지만, 그도 다 지나간다는 것을. 인생의 고비란 나무의 겨울과 같아서 그것을 잘 이겨낸 후의 삶은 향기로운 꽃이 피고 탐스러운 열매를 맺게 된다. 사계절이 없는 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어찌 봄의 환희를 알 것이며, 새싹의 신비와 눈의 낭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온실 속의 청매가 벌써 다 지려 한다. 첫 꽃송이가 핀 그날부터 청향을 듣고는 있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 동안 온갖 고난을 견디고 눈 속에서 피어난 향기에 비하면 미약하기만 하다.

벌써 몇 개월째 장롱과 신발장에 갇혀 있는 봄 옷가지와 신발들을 이참에 챙겨봐야겠다. 내가 이토록 봄을 앞당기려 하는 것은 혹독한 추위가 두려운 탓이요, 봄날 생명의 환희가 못내 그리워서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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