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온돌

온돌은 한민족의 독특한 난방 구조다. 한민족은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구들고래를 만들고 구들장을 놓는 독특한 난방 방식을 개발했다. 아궁이를 통해 연기는 빠져나가고 열은 구들장에 전달돼 서서히 복사열을 방출하며 한밤 내내 방바닥을 따뜻하게 덥혔다. 온돌은 열의 전도와 복사, 대류를 다 이용하는 과학의 산물이다.

온돌은 기원전 3세기 옥저 유물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있다. 4세기경 황해도 안악 3호분의 고분 벽화에도 등장하는 것이 온돌이다.

온돌은 서민들의 보편적인 난방 수단은 아니었다. 태종 17년 윤 5월 14일의 조선왕조실록은 성균관의 유생 가운데 중병을 앓는 이들이 생기자 온돌방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모두가 온돌을 사용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온돌이 보편화한 것은 조선 효종조 김자점에 의해서였다. 당시 한양을 둘러싼 남산과 인왕산, 북악산은 산불이 잦았다. 산불이 나면 수북이 쌓인 솔잎 때문에 도성 내로 번져 길거리에 나앉는 백성이 수도 없이 생겼다. 이를 지켜본 김자점은 온돌을 보급하기로 했다. 백성들이 솔잎을 온돌 연료로 사용할 것이고, 산불도 잡을 수 있을 것이란 계산이었다. 산불 견제용으로 부각된 온돌은 급속히 확대됐다.

부작용도 컸다. 백성들이 산에 있는 나무란 나무는 다 베 땔감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나무 값은 치솟았고 한양 주변은 민둥산으로 변했다. 겨울에 추위를 피하는 대신 여름이면 홍수 피해를 고스란히 뒤집어쓰게 됐다.

부작용이 불거지자 숙종은 소나무를 베지 못하게 금송 정책을 실시했다. 하지만 이미 온돌의 따뜻함을 맛본 백성들은 나무 베기를 멈추지 않았다. 정조는 나무 베기를 금지하기보다는 나무 심기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1789년 심기 시작한 나무는 1795년까지 1천200만 그루를 넘었다.

우리의 온돌 문화와 비슷한 것이 중국의 캉(杭) 문화다. 중국은 북부 일부 지역에서 사용하는 이 바닥 난방 방식이 자기들의 고유 기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국토교통부가 우리 민족의 전통 난방 방식인 온돌을 중국에 앞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방안 마련에 나섰다. 우리나라는 온돌의 종주국이다. 그 독창성과 우수성을 세계로부터 서둘러 공인받을 필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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