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 경칩이 지나니 날씨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겨우내 얼었던 흙이 풀어지면서 그 틈으로 햇살이 들어간 모양이다. 뱀이 눈 뜨고, 개구리도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신기한 것은 절기다. 때가 되면 남쪽에서는 어김없이 봄 소식이 날아온다. 매화가 선두에 있다. 매화로 해서 겨울이 물러가고 봄이 온다. 매서운 한겨울의 추위를 뚫고 고고하게 꽃망울을 터뜨리기에 매화가 아닌가. 그 작고 얇고 단아한 자태는 마침내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다. 이상하게도 매화 향기는 코가 아니라 눈으로 맡아진다. 옛 선비들은 동구 밖 흰 눈 속에서도 매화향이 느껴진다고 노래했다. 꽃망울 터지는 소리도 귀를 거쳐 눈으로 들려온다.
백운산 자락에 핀 한 떨기 매화가 푸른 물과 어우러져 수채화를 그린다. 짓궂은 바람이 간간이 꽃잎을 수면 위로 날려 보내지만 매화는 도도하다. 봄볕이 고양이처럼 살그머니 다가와 꽃잎을 핥는다.
언덕 위에는 오래된 매화 등걸이 보인다. 100년은 족히 넘었음 직한 고목이다. 고사 직전 응급치료를 한 듯 뿌리와 몸통을 시멘트로 이어 놓았다.
몸에서 나온 가지는 반 이상 잘려나갔다. 분신을 잃고 남은 몇 가지가 민망한 듯 조용히 팔을 뻗고 있다. 신기한 일이다. 아무도 봐 주는 이 없는 늙고 초라한 나무 등걸이 저 거칠고 차가운 시멘트를 뚫고 뿌리로부터 물기를 뿜어 올리다니! 저토록 튼실한 몸통과 가지가 있기 위해서는 뿌리는 또 얼마나 멀리 뻗어 있어야 할까.
꽃을 뒤로하고 나무 등걸로 다가가 거친 나무껍질을 손으로 쓸어본다. 온갖 간난과 전쟁을 겪었을 세월이 온기를 지니고 전해오는 듯하다. 꽃들아, 잘난 척하지 마라. 세상의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가녀린 뿌리 하나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니. 꽃의 사랑, 꽃의 환희도 뿌리에서 길어 올린 빗물 한 방울에서 만들어지지 않던가.
어디선가 작은 새 한 마리가 매화 등걸 위에 날아와 앉는다. 온몸이 하얀 깃털을 한 새다. 까치인가? 여인의 넋인가? 기생 매화의 화신(化身)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매화 옛 등걸에 봄졀이 도라오니/옛 퓌던 가지에 피엄즉도 하다마는/춘설(春雪)이 난분분(亂紛紛)하니 퓔동 말동 하여라
길조든 여인이든 상관있으랴. 매화 옛 등걸에는 지금 꽃 대신 새가 앉아 있다. 함께 봄을 즐길 모양이다.
소진/에세이 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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