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필귀정] 흔들리는 기준, 유연한 기준

17세기 후반 부산 초량왜관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조선과 일본은 왜관을 중심으로 쌀과 인삼, 면포, 생사, 구리, 납 등을 거래했다. 그런데 쌀의 양을 재는 1말짜리 되(木+升)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었는데 두 나라의 되가 서로 달라서다. 정평승(正平木+升)으로 불린 조선의 되는 일본의 표준 되인 경승(京木+升)의 3분의 1 크기인데다 모양도 직사각형이고 모서리에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다시로 가즈이 게이오대 교수의 '쇄국 시대의 일본인 마을-왜관'에 따르면 계량 관습과 기준의 차이가 혼란을 불렀다고 한다.

일본은 쌀을 잴 때 되 위로 수북하게 올라온 쌀은 수평으로 깎았다. '도카키'라는 홍두깨 모양의 봉으로 되 높이에 맞게 평미레질을 했다. 하지만 조선은 되 위로 쌀을 수북하게 담아 쟀다. 되 높이보다 높이 올라간 쌀이나 재면서 멍석 위에 떨어진 쌀은 조선 관리의 차지였다. 이런 차이가 불편하고 어색했는지 별도의 되가 등장하는데 조선의 되보다 구경이 한층 작은 직사각형의 되를 만들었다. 양쪽을 절충한 방식인데 왜관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시스템이었다. 1960, 70년대만 해도 되박으로 쌀을 잴 때 평미레질을 하되 끝까지 하지 않고 끝 부분을 살짝 남긴 것도 그 영향이라 할 수 있다.

'기준'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의 기본이 되는 표준이다. 서로 편차가 날 경우 표준이나 참고로 활용하는 잣대다. 일정한 기준이 없다면 크기나 양을 재기 힘들어 혼란을 부른다. 이런 문제점을 막기 위해 기준을 정하는데 타협과 절충의 산물이다. 기준이 섰다는 것은 대다수가 수긍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이자 표준이라는 말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이런 기준을 두고 혼란을 빚고 있다. 단적인 예로 김연아의 체육훈장 '청룡장' 여부를 놓고 갑론을박이다. 청룡장은 체육계 최고 훈장인데 그동안 타 분야에 비해 너무 많았던 게 논란의 단초다. 최고 훈장으로서의 희소성이 떨어진다는 여론 때문에 정부가 올해 서훈 기준을 강화하면서 김연아가 '맹호장' 수훈 대상이 된 것이다.

여론이 들끓자 결국 정부는 기준을 바꿔서라도 청룡장을 주기로 결정했다. 그보다 못한 이도 청룡장을 받는데 누가 봐도 자격 있는 사람이 받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냐는 여론이 기준을 흔든 것이다. 일부 주장처럼 이는 정책 졸속의 문제는 아니다. 기준이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고 새 기준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점을 무시한 결과다. 공동체의 보편적 가치나 합의를 뛰어넘을 수 있는 기준이나 원칙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한다면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물론 다수결의 원칙이나 대입 점수처럼 평가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절대적 기준과는 별개의 문제다.

최근 세계적인 논란을 초래한 자동차의 파노라마 선루프 결함 문제도 이런 경우다. 국토교통부가 국내외 자동차 제작사의 55개 파노라마 선루프 65만 대 전체에 대해 결함이라고 잠정 결론을 내리고 리콜 입장을 세웠다. 현대, 벤츠 등 12개 제작사가 국제 기준보다 엄격하다며 반발하자 정부가 최근 제네바 유엔 자동차기준조화포럼에서 파노라마 선루프 강화유리 결함과 안전성 문제를 세계 최초로 공식 제기했다. 시험 결과를 제시하자 각국 위원들이 "이건 문제다"(This is problem)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기준을 둘러싼 논란은 부지기수다. 임대차 소득에 대한 과세 기준인 2천만 원과 2천1만 원의 차이도 그렇고, 밀양 송전탑 건설에 따른 보상 기준인 송전탑 180m 이내와 181m의 차이도 논란거리다. 밀양시 송전탑 건설 보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법률(송주법)을 적용하면 송전선이 지나는 밀양시 4개 면 7천800여 가구의 고작 0.39%인 31가구만 보상받을 수 있다고 한다. 또 2016년부터 실시되는 정년 60세 기준을 놓고 직장마다 일고 있는 적용 대상 연령 논란도 마찬가지다.

기준이 없거나 입맛대로 휘둘리는 것은 문제다. 하지만 기준이 지나치게 경직되고 철저히 고정돼 있다면 이 또한 혼란을 부를 수 있다. 기준은 확고하되 그 정신은 늘 열려 있어야 한다. 사회적 합의와 타협을 통해 기준을 높이거나 조금 물릴 수 있다면 혼란이 지금처럼 커지지는 않을 것이다. 기준을 마련한 가치와 정신을 지키되 상황에 따라 서로 합의해 조금씩 양보하고 절충할 수 있다면 보다 합리적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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