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사물이나 생명이 가진 고유의 이름마다 그만의 '힘'이 있다고 믿는다. 어릴 적에 곧잘 주인공의 이름에 힘이 담겨 있는 이야기를 읽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내가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순간부터 줄곧 그렇게 생각해 왔던 것 같다. 그래서 용 그림에선 그의 눈동자가 용이 승천하게 만드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의 힘을 가졌듯, 사물이나 생명이 가진 각각의 이름이 그 이름의 대상을 완성시키는, 용의 눈동자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 때문인지 무언가의 이름을 정할 때면 나름 고민을 한다. 어릴 적 자그마한 봉제인형의 이름 하나를 정할 때에도 사뭇 진지해져서 짧게는 몇 시간 혹은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 이런 점은 체셔가 우리 집에 처음 왔을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체셔'가 가장 먼저 내 머릿속에 떠올랐던 이름이긴 했지만 그 이름으로 결정하기까지 수많은 이름들이 생각 속에서 둥둥 떠다녔다. 다행히 앨리샤의 이름을 생각할 때는 체셔와 연관성 있는 이름 위주로만 생각했기에 좀 쉬웠다.
사실 강아지를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한 후에 강아지 이름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그중에 가장 먼저 떠올랐던 건 '루이스'였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체셔와 앨리샤 두 이름을 따온 만큼 그다음 강아지 역시 이와 관련된 이름이면 좋겠다고 생각했기에, 그 이야기의 작가의 필명인 '루이스 캐럴'에서 따와 '루이스'라고 지으면 어떨까 생각했었다. 그리고 왠지 강아지와 '루이스'라는 이름은 꽤나 잘 어울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우리 집에 온 '강아지' 녀석을 보고 난 이후엔 도저히 '루이스'라는 이름을 붙일 수가 없었다. 이제 더 이상 앨리스와 연관된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되기에 좋은 일인지, 슬픈 일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녀석은 '루이스'와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외모였다. 내가 생각한 '루이스'라는 이름대로의 강아지라면 무언가 굉장히 점잖고 느긋한 성격이어야 했지만, 우리 집에 온 녀석은 훨씬 풋풋하고 생기발랄했으며 애교도 많은 귀여운 녀석이었다. 결국 이런 녀석에게 '루이스'라는 이름을 붙여줄 수 없다고 판단한 나는 또다시 작명 삼매경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체셔'나 '앨리샤'나 이름이 어렵다는 평들이 많았기에 좀 부르기 쉬운 이름이 어떨까 생각하며 '밍밍' '딩딩' 같은 이름들을 떠올려봤다. 하지만 영 내키지가 않았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추천해 준 '진순이' '깡순이'는 또 어떨까 생각해 봤지만, 내 욕심엔 뭔가 또 부족했다. 왠지 진순이나 깡순이는 녀석과 어울리기는 했지만 우리 마을에도, 여럿 있을 법한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가 진 이후에도 한참을 고민하던 나에게 정말 찰나의 순간, 드디어 생각났다. 바로 아침에 찍은 녀석의 사진을 빤히 바라보며 생각나는 이름을 종이에 적던 중이었다. 바람에 살랑이는 갈색의 무르익은 보리밭, 녀석이 자신의 갈색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나를 반기던 모습에서 자연스레 '보리밭'이 떠올랐고, 그 순간 녀석은 '보리'일 수밖에 없겠다는 판단이 섰다. 게다가 녀석의 색깔과 내 느낌뿐만이 아니라 보리(Bodhi) 라는 불교 용어를 생각하니 더욱더 녀석을 보리라고 부르고 싶어졌다. 불교 용어에서 말하는 '보리'란 으뜸이 되는 성숙한 '지혜'를 일컫기도 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정하고 '보리야~' 하고 입 밖으로 꺼내어보니 정말 입에 '착착' 감겼다. 게다가 '보리야, 보리야' 하고 부를 때마다 마음엔 편안함이 절로 찾아왔다. 아마도 이게 바로 내가 녀석에게 붙여준 '보리'라는 이름이 가진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직은 어리지만 장차 늠름하게 자라서 우리 집이 늘 평안하도록 지켜줄 따뜻한 '보리'의 힘 말이다.
장희정(동물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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