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서명수의 집중 인터뷰] KT&G 상상마당 '시네랩' 김형희 실장

국내 유일한 '마스터링 테크니션'…알고 보니 독립영화계의 대부

서울 서대문구 홍대 앞 주차장 골목에 있는 KT&G 상상마당 시네랩(cine lab)을 책임지고 있는 김형희 실장의 정식 직책은 '과장'이다.

그는 영화의 색 보정 작업을 총괄하는 컬러리스트이기도 하고, 색 보정 작업을 넘어 촬영과 디지털 전환 등의 기술적인 측면까지 도맡고 있다는 점에서 '마스터링 테크니션'이라고도 불린다. 혹은 색을 입힌다는 뜻에서 '컬러 그레이딩' 기사라고도 한다. 우리 영화계에서 '마스터링 테크니션'이라는 직업으로 일하는 사람은 그가 유일하다. 물론 컬러 그레이딩이 주 업무이긴 하지만….

대한민국의 독립영화는 거의 상상마당 김 실장의 손을 거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독립영화계의 대부격이다.

독립영화 한 편에 대한 상상마당의 색 보정 비용은 상업영화에 비해 6분의 1 수준이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2008년 설립된 이후 지금껏 시네랩이 운영된 것은 김 실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가 없었다면 한국의 독립영화는 지금보다 훨씬 나빴을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그의 꿈은 10년 안에 제주도에 작은 시네랩을 만들어 수준 높은 독립영화에 무료로 색 보정 작업을 해주는 일이다. 그때쯤에는 연금이라도 나와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10년으로 잡았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엉뚱했다. 그 꿈이 현실화된다면, 그는 두 가지 기준으로 독립영화를 선택하겠다고 했다. '웃기는 영화'와 '예쁜 여배우' 순이라는 것이다.

"독립영화라는 것은 '튀는 것'을 하고 싶어서 하는데, 다 아는 이야기지만 상업영화에서 하지 못하는 것을 시도한다는 독립영화에도 '틀'이 있다. 독립영화는 이렇게 가야 한다는 틀이 있는데 이것을 없애야 한다. 독립영화는 제작비가 없어서 유명배우를 쓰지 못할 뿐만 아니라, 여배우가 예쁜 꼴을 못 본다. 여배우를 망가뜨려야 독립영화라고 생각한다. 또 독립영화는 진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진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사실 웃기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실제로는 웃기는 것이 어려워서 진지한 영화를 하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우울하고 진지하고 여배우를 망가뜨리는 영화는 수도 없이 많았다. 제 취향에 따라 선택하고 싶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독립영화의 공간은 넓지 않다. 할리우드는 물론 한국영화까지 거대 자본을 동원한 '블록버스터급' 대작영화에 길들여진 관객들에게 극영화든 다큐멘터리든 독립영화는 크게 어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독립영화 한 편의 평균 관객 수가 3천 명에 불과하다는 점은 우리 독립영화의 현실을 반영하는 상징적인 지표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문화적 다양성을 채워주고 있는 독립영화의 생태계는 여전히 바닥 수준이다. 그런 독립영화계에 상상마당 김 실장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영화에 '색을 입히는' 화려해 보이는 일을 하는 그의 작업공간은 100인치 스크린을 갖추고 있는 지하 3층의 암실(暗室)이다. 어둠 속에서 만난 그는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기른 생머리 덕분에 영화 속 소녀처럼 느껴졌다. 또한 그가 하는 일은 디지털 작업이지만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듯, 한 컷 한 컷 수작업으로 꼼꼼하게 색을 보정하고 되돌리는 무한 반복작업은 총천연색 영화와는 거리가 있는 무채색의 세계다.

-요즘 작업하고 있는 영화 중에 재미있는 것은 없나.

"제가 작업하는 영화의 감독들이 자꾸 저한테 피드백을 받으려고 하는데 제 공식 멘트는 "저한테 작업하러 갖고 온 영화 중에 재미있었던 영화는 한 편도 없었다'이다."

그의 겸손한 엄살과는 달리 그의 손을 거쳐 간 수많은 독립영화들이 세계적인 암스테르담 국제 다큐영화제는 물론 부산국제영화제 등에 출품돼 상을 받았다. 지난해 12월 아깝게 세상을 떠난 '오래된 인력거'의 고(故) 이성규 감독도 오랫동안 김 실장과 작업을 함께하면서 남긴 제작노트를 통해 "'상상마당'의 김형희 기사는 다행히도 연출자인 내 의도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어 작업하는 게 그저 즐겁고 행복하기만 하다…라며 무한한 신뢰를 보이기도 했다.

-'마스터링 테크니션'은 생소하다.

"국내에서는 저 외에는 없다. CF 쪽에는 있는데 영화 쪽에는 없다. 물론 할리우드에는 있다. 어떻게 보면 기술 천시라고도 할 수 있다. 색 보정 등 영상작업을 하다 보면 기술적 문제가 있어서 오류가 꽤 난다. 그것을 해결해 주는 것을 우리나라에서는 색보정 작업의 덤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 마스터링에 대해서는 돈 주고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원래 영화판에서 없었던 역할은 아니지 않은가.

"강좌를 자주 하는데 거기서 저는 '전통을 버려서 그렇게 됐다.'고 이야기한다. 예전에는 디지털이 아니라 필름으로 영화를 찍었다. 예전 필름 공정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이해하면 쉽다. 디지털이라는 것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이전에 필름으로 하면서 해왔던 공정을 디지털로 대체한 것이지 공정 자체는 그대로다.

그런데 최근 입문한 사람은 그냥 그것부터 시작하게 되니까 그 과정을 모르고 생략하게 된 것이다. 방송국이 심한데 (그 과정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필름에서 디지털로 영화 촬영이 넘어가면서 앞선 전통을 넘겨받았어야 하는데 기존 작업자들을 도태시켜버렸다. 왜냐하면, 그분들이 경력이 많아 PD들이 핸들링하기가 버거우니까 디지털이란 핑계로 젊은 친구들로 물갈이했다. 그러면서 수십 년 동안의 노하우를 다 폐기처분했다. 따라서 지난 5년간은 맨바닥에서 새 판을 다시 짠 것이나 다름없다.

제 생각이지만 지난해 하반기부터 비로소 미학적인 시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여태까지는 정말 컬러 그레이딩과 문제 있는 부분을 보완하는 개념이 더 강했다. 영화를 미학적인 관점에서 예쁘게 만들겠다는 시도가 인제야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원래 공대 출신이었다는데.

"영화 쪽 일을 하게 된 것을 운명이라고 할 수는 없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막상 취직하려고 했더니 IMF가 터져 공채도 어렵고 말 그대로 쉽지 않았다. 전기과를 나왔지만 학교에서는 '모르면 만지지 마라. 잘못 만지면 죽는다'는 것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가 만지는 전기는 최소한 1만9천800볼트였다. 학교 다닐 때 공부를 별로 안 했다. 그때가 제 인생의 최대 위기였다. 그 순간 내가 그동안 살면서 하고 싶었던 것이 없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렇게 프로그래밍한다고 백수생활 하다가 'SBS 방송아카데미 모집' 광고를 보고 저기 들어가면 방송국에서 뽑아주겠지 하는 생각에 CG 과정에 들어갔다. 막상 들어갔더니 방송국과는 상관없는 학원이었다. 그러나 제 인생 처음으로 진로에 대한 선택이었기 때문에 지금껏 한 번도 때려치우려고 하거나 후회한 적은 없었다. 영상을 하겠다며 들어간 프로덕션에서 혼자서 공부하다가 쌓이고 쌓여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외국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수준은 어떤가.

"결국 돈 문제다. 돈이 없어서 제대로 하지 못한다. 제가 카메라도 공부한다. 처음에는 촬영감독이 왜 이렇게 찍어온 것인지 궁금해서 카메라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해보니까 이래서 안 되는구나라는 것을 알게 됐다. 촬영현장에서는 시간을 주지 않는다. 시간을 끌어서 (촬영) 회차가 늘어나면 돈이 더 드니까 참 힘든 것 같다. 다만 들어가는 제작비치고는 우리는 어마어마하게 잘 찍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 영화는 외국영화에 비해 3분의 1 정도의 제작비를 들여 대단히 우수한 품질의 영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지금까지 작업한 영화는 몇 편이나 되는가.

"정확히 알 수 없다. 독립영화를 주로 상대하는데 상업영화가 한 달 정도 작업한다면 독립영화는 장편이라도 5일 정도 하는 팀이 많다. 그것은 정말로 기초적인 것만 하고 끝내는 거다. 색 보정은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고 그중에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는 그런 개념인데 거기에 이르지 않고 대충 문제없이 끌어가는데 5일 정도가 걸린다. 그것만 하고 끝나는 거다.

돈이 없어서 못하는 것은 독립영화나 상업영화나 똑같다."

-영화는 대중들에게 화려하게 보이는데 색 보정 작업 환경은 생각보다 열악해 보인다.

"상상마당의 근무여건이 아주 좋다. 회사에서 내쫓기 전에는 절대로 나갈 생각이 없다. 상업영화를 하는 다른 업체는 개봉 날짜가 정해졌기 때문에 만날 밤새고 난리다. 저는 오후 7시가 넘으면 퇴근해서 집에 갈 수 있다. 이 바닥에서는 비교적 느긋한 직장이다."

-정말로 꿈이 있다면, 직접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은가.

"아까도 말했지만 먹고사는 걱정 없이 제주도에 색 보정 업체를 하나 만들어, 영화의 마지막 작업으로 감독들이 쉬었다 가는 코스를 구상하고 있다. 아직도 저는 갈 길이 멀었다고 생각한다. 지금보다 10년은 더 일해야 한다.

직접 찍고 싶다기보다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있다. 돈이 많이 들어서 도저히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수나라 백만 대군이 나와야 한다. 이번에 명량대첩을 소재로 한 영화가 나오는데 제가 기획하는 것이 해군 3부작이다. 맨 마지막이 명량대첩인데 뺏겼다는 생각이 든다.( 웃음) 2편이 수나라 백만대군이 쳐들어왔을 때의 상황이다. 그 수나라 대군의 보급을 끊었던 것이 우리 수군이었다. 아무도 그런 사실을 기억하지 않는다. 이순신 장군이 국가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활약한 것을 우리는 안다. 해군은 우리 역사에서 늘 그런 대접을 받았다."

그의 해군(수군) 이야기는 화려한 영화의 뒤에서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고독한 김 실장의 처지를 대변하는 것처럼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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