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우리 동네에 외과병원이 하나 있었다. 윗동네, 뒷동네, 옆동네에도 그 병원이 유일했다. 편도선이 부어 열이 펄펄 끓어도 갔었고, 설사가 나고 배가 아파도 갔었다. 그때마다 인상 좋고 마음씨 고운 원장 선생님은 "자~ 보자" 하면서 목 안을 들여다보고, 배를 눌러보면서 진찰하고 주사 한 대, 약 몇 첩을 지어주었고 그러면 다 나았다.
옆집 철이가 넘어져 팔뼈가 부러졌을 때도 깁스를 해서 낫게 했고, 앞집 순이 엄마가 식은땀을 흘리며 얼굴이 하얘졌을 때도 배 속에 피가 고였다고 수술해서 살려냈다. 그때의 원장 선생님은 만병통치 의사였고, 우리는 몸 어디라도 아프면 어느 병원으로 가야 하나, 어느 의사에게 가야 하나 고민할 필요도 없이 곧장 그 외과병원으로 가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 요즘은 어떠한가? 외과도 대장항문, 유방갑상선, 간담도, 혈관, 이식 등으로 세분화돼 있고 내과도 소화기, 내분비, 감염, 호흡기 등으로 세분화돼 있어서 의료 소비자인 환자 입장에선 적절한 병원과 의사의 선택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근래에 와서는 1년간의 인턴, 4년간의 전공의 과정을 거쳐 전문의가 된 뒤에도 다시 세부과정의 전문과정을 적게는 1년, 많게는 수년간을 거쳐야 한다. 이러다 보니 전공이 다르면 같은 외과나 내과 의사라고 해도 자기 전공 분야 외엔 잘 모른다는 것이다. 배가 아프다고 그냥 내과나 외과병원에 가면 그 의사의 세부전공에 따라 사뭇 다른 결과를 얻게 될 수도 있다.
최근 작은 도시 한 병원에서 웃지 못할 일이 생겼다. 외과의사가 이직으로 비어 있어서 곤란을 겪던 차에 군 복무 대신 의료취약지구의 병원에 근무하게 되는 공중보건의사로 외과의사를 배정받게 됐다. 이제 지역 외과 환자들을 볼 수 있게 됐다고 병원 측은 안심하고 있었는데, 며칠 만에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맹장염으로 진단이 내려진 환자가 생겼는데 그 외과의사가 맹장수술을 못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유방을 전공했기 때문이란다. 맹장수술을 한 지가 하도 오래돼서 못 한다고 했다.
세분화되고 전문화되는 것이 의학의 발전을 위해, 아울러 높은 수준의 질병 진단과 치료를 위해 필요한 것은 맞다. 그러나 일반인 입장에서는 의료 이용이 갈수록 복잡해지고 어려워져 오히려 불필요한 비용을 쓰게 됐다.
세상이 점점 복잡해지고 정밀해지고, 경쟁도 치열해지다 보니 전문성을 가지려는 노력들이 때로는 평범하고 소박한 일상을 더 힘들게 한다. 의료의 세분화 전문화도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어린 시절 동네 병원의 만병통치 의사였던 그 원장님이 그리워지는 것은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박경동 효성병원 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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