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이 독립된 주체로서의 '나'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먼저 걸어간 길을 걸어가는 익숙함과 편안함을 버리고 낯설고 두려운 것에 대면할 수 있는 용기를 길러야 한다. 인문적 통찰력은 학생들이 독립적 주체로서의 '나'로 설 수 있는 용기를 키워줄 수 있는 힘을 줄 것이다.(최진석의 '인간이 그리는 무늬' 중에서)
세상이 온통 인문학이다. 속된 표현을 빌리면 개나 소나 인문학이다. 국회에서는 인문사회과학진흥법안, 인문정신문화진흥법안, 인문학 진흥 및 인문강좌 지원 법안 등 3개의 법안이 발의된 상황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아예 인문정신문화과를 신설하기까지 했다. 케이블은 물론 지상파 방송까지도 국내외 유명 인문학자를 초대해 인문학 관련 내용을 담는다.
기업들도 채용을 비롯한 다양한 방면에서 인문학 잣대를 들이대고, 기업이나 공공기관의 직원 대상 교육에도 '인문학에서 ~을 만나다'라는 이름을 지닌 프로그램이 봇물을 이룬다. 10년은 걸려도 힘들 일들을 6개월 만에 해내는 대단한 나라임을 인문학을 통해서도 확인할 태세다.
하지만 이러한 풍경을 바라보는 심정은 솔직히 불편하다. 인문학의 중심이랄 수 있는 대학조차도 인문학을 버린 현상 속에서 이처럼 갑작스런 관심이 긍정적으로만 느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스쳐 지나가는 이벤트로 끝나버릴까 봐서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수만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대안이 인문학일 수 있는데 이러한 현상들로 말미암아 오히려 인문학이 왜곡되고, 그 때문에 부정되고, 결국은 쓰레기로 취급되어 버려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 말이다. 인문학은 말 그대로 '사람의 무늬(人紋)'를 다루는 학문이다. '물질의 무늬(物紋)'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그래도 인간이 더 소중하다는 마음을 깨닫는 것이 인문학이다.
사실 초'중등교육에서 교육과정만 제대로 운영되어도 인문학이 따로 필요하지는 않다. 모든 교과목은 인문학적인 마음을 담고 있다. 하지만 질문과 사고가 사라진 교실, 대입을 위한 암기만 존재하는 학교교육에서 인문학을 담는다는 것은 무척 어렵다. 바로 거기에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입시에 매몰되어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하기 위한 시민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청소년, 꼭대기만 올라가느라 삶의 의미를 생각하지 못하는 아이들, 그래서 결국은 공허한 삶을 살 수밖에 없거나 절망적인 선택을 해버리는 우리들에게 무엇인가를 채워주고 싶었다.
불안한 자유와 안정된 구속 중에서 기꺼이 구속을 택하는 젊은이들을 탓하기보다, 원래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위로하기보다, 그러한 자신의 본질과 그것을 둘러싼 사회 전반을 들여다볼 기회를 제공하고 싶었다. 나의 의미는 애써 도달하는 목적지에 있는 게 아니라 지금 걸어가는 나의 길 곳곳에 존재함을 말하고 싶었다. 존재하는 대부분의 것들을 보지 못하는 빠름의 세상 속에서 보고 싶은 것, 보아야 할 것들을 바라볼 수 있는 느림을 가르치고 싶었다. '여기'와 '저기'에 매몰되어 '사이'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경계'의 의미를 느끼게 하고 싶었다.
3년 전부터 토론교육을 시작하면서 인문학에 대한 계획을 함께 준비했다. 토론에서 다루는 논제는 시사적인 부분도 있지만 대부분 인문학적인 질문과 연관되어 있다. 특히 작년부터 독서토론과 연계하면서 그 부분을 강화했다. 새롭게 TF팀을 구성해 학교교육에서 가능한 정책들을 개발했다.
인문학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아무리 말해도 콧방귀도 뀌지 않던 사람들이 최근 들어 갑자기 돌변했다. 인문학은 짧은 시간 정책의 결과를 요구하는 분야가 아니다. 천천히 그리고 오랜 시간 걸어야 하는 정책이다. 인문학조차 뜨겁게 달았다가 바로 식어버리는 모래알 정책이 되면 우리나라가 너무 슬프지 않나?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정진호의 매일내일(每日來日)] 3·1절에 돌아보는 극우 기독교 출현 연대기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김세환 "아들 잘 부탁"…선관위, 면접위원까지 교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