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밑줄 쫙∼대구 역사유물] (13)대구에서 발견된 한경(漢鏡)

한·중·일 이어준 '마법 거울'…청동기시대 교류 네트워크 '흔적'

거울의 본질은 투영이다. 무언가에 대상을 비춰 본다는 것은 단순한 투사(投射) 이상의 의미가 있다. 외모의 반사를 넘어 성찰의 의미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거울은 신성(神聖)의 표시나 수신(修身), 종교적 권위의 상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고고학적 관점에서 본 거울의 기원은 청동거울이다. 중국 은주(殷周)대부터 문헌에 '경'(鏡) 글자가 나타났다고 하니 BC 10세기 이전에 거울이 등장했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 거울의 역사도 청동의 등장, 동검의 출현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1974년 대구 서구 평리동 아파트 공사장 분묘에서 청동거울이 발견됐다. 동경(銅鏡)의 발견은 전국적인 현상이니 여기까지는 특이할 점이 없다 하겠다. 그런데 이 거울이 중국에서 생산된 거울, 즉 한경(漢鏡)으로 밝혀지면서 이 유물은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 조그만 청동 조각은 청동기시대에 이미 중국과 한반도가 교역망으로 직접 연결됐거나 최소한 양국이 교류, 교역 영향권 안에 있었음을 입증하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선사시대 대구와 중국을 이어준 흔적, 한경 속으로 들어가 보자.

◆중국 거울보다 뛰어난 '다뉴세문경'=동경은 태양숭배와도 통한다. 청동기인들에게 해는 숭배의 대상이었다. 거울에 반사되는 태양빛도 상서롭게 여겼다. 그 빛에는 하늘의 메시지가 담겨 있어 사람들의 소망도 실어 나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면 유리 거울은 언제쯤 등장했을까. 낙랑시대 고분에서도 벌써 유리가 보이니 그 무렵 거울이 나온 듯하지만, 거울이 대중화된 건 12, 13세기 유럽에 들어와서이다. 유리 뒤에 수은을 입히면 거울이 되는 현상을 아직 몰랐을 때였다.

한반도 동경의 정수는 다뉴세문경(多鈕細文鏡)이었다. 다뉴세문경은 꼭지가 여러 개 달린(多鈕) 거울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한반도만의 독특한 양식이다. 세문(細文)은 섬세한 기하학적 문양을 새긴 것을 말하는데 어떤 것은 머리카락 굵기(0.1~0.2㎜)의 선이 1만 개가 넘는 것도 있어 현대 기술로도 복제가 힘들다고 한다.

다뉴세문경으로 기술력이 정점에 달했던 한반도의 동경은 어느 순간 맥이 끊기게 된다. 애써 만들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생겼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이때가 중국식 거울이 본격적으로 수입되는 시점으로 보고 있다.

다시 대구의 청동기 거울로 돌아오자. 대구 평리동 아파트 공사 중 발견된 이 분묘에서는 한경, 방제경 등 모두 7점의 청동거울이 출토됐다. 한경은 지름이 10.6㎝로 영천 어은동(漁隱洞) 출토 한경과 같은 양식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모양과 형태에서 비슷하다. 방제경(倣制鏡)은 말 그대로 '본뜬 거울'의 뜻이다. 방제경은 한경이 전파되고 난 후 이것을 모방한 거울. 큰 것 1점, 작은 것 4점이 나왔다. 큰 것은 지름 15㎝, 작은 것은 4.5∼5.8㎝이다. 소형 방제경은 초기형으로 영천 어은동의 것과 형식이 같다. 대형도 기본적으로 영천 출토 사례와 비슷해서 금호강을 따라서 양 지역 간에 밀접한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제 한경을 들여다보자. 한경은 중국 전한(前漢), 신(新), 후한 시대 거울을 총칭하는 말. 주로 풀잎, 별자리, 동심원이나 연호(連弧)문을 새겼고 그 사이에 명문(銘文)을 한 것이 특징이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한경에는 사유금수문경(四乳禽獸文鏡), 성운경(星雲鏡), 소명경(昭明鏡), 일광경(日光鏡), 방격규구경(方格規矩鏡) 등이 있다. 한경은 중국에서는 화장용으로 쓰였고 한국과 일본에서는 신분을 상징하는 위신재(威信財)로 사용된 것으로 추측한다.

◆낙랑과 교역과정서 지역으로 유입된 듯=한경의 전래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사건은 한사군(漢四郡) 설치. 한사군은 BC 108년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무너뜨린 후에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 설치한 행정구역이다.

한경은 한사군 중에도 특히 낙랑과 관련이 있다. 당시 낙랑은 중국과 한반도를 잇던 무역의 중심지였다. 전문가들은 초기 철기시대에 낙랑과의 교역이나 조공(朝貢)과정에서 한경이 유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면 이 중국 거울은 어떻게 대구경북으로 들어오게 되었을까. 한경이 지역으로의 유통 경로는 크게 두 가지로 추측된다. 첫째는 진, 변한의 소국들과 낙랑과의 교역과정에서 직수입되었을 가능성이다. 진'변한은 지금 대구경북지역으로 비정(比定)되고 있다. 낙랑과 교류가 잦았던 다른 지역에서도 한경이 많이 발견되는 사실이 이 가설에 힘을 실어준다.

둘째는 한사군에서 한반도 서북지역으로 퍼져 나간 교역품들이 한강 수로를 따라 내륙으로 남하했을 가능성이다. 동경 출토가 집중된 상주, 영천, 대구, 김해지역이 한강, 낙동강 수계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이 추측도 신뢰를 얻고 있다.

◆한, 중, 일 문화 전파 실마리 '방제경'=방제경은 국가 간 문화전파 경로를 추적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전국적으로 발견되지만, 대구 지산동, 평리동, 영천 어은동(영천시 금호읍) 등 주로 영남지역에서 출토된다.

대구, 영천 등 경북 내륙의 방제경은 전한경(前漢鏡)을 모방한 것으로 지름 6㎝의 소형이 주를 이룬다. 경산시 압량면 신대리의 것은 지름이 3㎝에 불과한 초미니 거울이다.

이청규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경산, 영천, 대구의 방제경은 문양, 형식, 크기에서 일련의 공통점이 발견된다"며 "이는 금호강을 따라서 방제경을 공유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방제경 출토와 관련해 재미있는 학설이 있다. 방제경이 일본에서 들어왔다는 이론이다. 한반도를 건너 일본에 전해진 청동기문화가 일본에서 꽃을 피워 한국에 역수출되었다는 논리다. 방제경 출토가 김해, 영천, 대구, 경주 등 일본과 가까운 남부지방에 집중된다는 것을 증거로 든다. 식민사관과 관련된 불순한 의도가 짐작되기도 하지만 새겨들을 부분도 있다. 흑요석이나 광형동과(廣形銅戈: 날이 넓은 형태의 동검) 같은 다른 유물들을 통해 이런 사실들이 일정 부분 확인되기 때문이다.

한경처럼 한'중'일 국경을 넘나들며 이슈를 만드는 유적도 드물다. 시기, 연대에 따라 그 특성이나 문양, 양식이 달라져 알면 알수록 자꾸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다. 본 제품 외에 짝퉁(방제경)까지 등장해 혼란을 더한다.

이 조그만 구리 조각이 국경을 넘나들며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키니 가히 '마법의 거울'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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