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서각의 시와 함께] 춘니(春泥)-김종길(1926~ )

여자대학은 크림빛 건물이었다.

구두창에 붙는 진흙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알맞게 숨이 차는 언덕길 끝은

파르한 보리밭-

어디서 연식정구의 흰 공 퉁기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뻐꾸기가 울기엔 아직 철이 일렀지만

언덕 위에선

신입생들이 노고지리처럼 재재거리고 있다.

-시집 『성탄제』, 삼애사, 1969.

해마다 봄이 되면 생각나는 시다. 시의 제목 춘니는 '구두창에 붙는 진흙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에 나타나 있듯이 '봄 진흙'이란 뜻이다. 어려운 표현도 없는 담담한 서술로 이루어진 시다. 구두창에 진흙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언 땅이 녹고 있음을, 파르한 보리밭은 봄의 생기를, 정구공 퉁기는 소리는 경쾌함을, 신입생들의 재재거림을 노고지리에 비유한 것은 상승 이미지를 느끼게 한다. 이런 이미지들이 어우러져 봄의 생동감을 그지없이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크림빛 건물, 파르한 보리밭, 연식정구의 흰 공에 나타난 색채 이미지도 상큼하다.

그저 담담하게 여자대학 주변의 풍경을 서술했을 뿐인데 봄의 설렘을 이렇게 명증하게 느끼게 할 수 있을까. 흔히 시를 쉽게 써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쉽게 쓰는 것이 사실 어렵게 쓰기보다 더 어렵다. 무기교의 기교란 이를 두고 말함이리라. 엘리어트의 이미지즘을 연구한 내공이 있기 때문이리라.

시인 kweon51@chol.com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