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040 광장] 흙이 있는 삶

1980년대 초 '국민학생'시절이었다. 군위군 한 시골마을에 있는 작은집에서 여름방학이면 일주일 정도 머물곤 했다. 또래 사촌들과 강가에서 물고기와 다슬기도 잡고 고무 대야를 튜브 삼아 물놀이를 했던 기억이 난다. 하루는 강가 부근 고추밭에서 일하시던 작은어머니께서 물놀이를 하던 우리에게 고추를 같이 따자는 것이었다. 고추를 사서 먹으면 되지 왜 더운 날 이렇게 힘들게 일하시는지 도시에 사는 어린 나는 의문이 들었다.

당시 작은어머니 나이만큼이나 되어버린 나는 지난해 여름 부모님을 모시고 휴가차 작은집을 찾았다. 작은집 옆집은 예전에 중학교 관사로 쓰던 집인데 작은집에서 매입하면서 게스트 하우스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작은아버지와 어머니는 집 마당에 공터를 일구어 작은 텃밭을 만들어 고추, 호박, 옥수수 등을 재배하고 계셨다. 마당에 있는 투박한 텃밭이지만 도시의 인공적인 조경보다 아름답고 여유로워 보였다. 그리고 휴가차 내려온 사촌 동생 내외와 물안경과 튜브를 가지고 물놀이를 가자고 조르는 조카들의 모습 속에 어릴 적 나의 모습이 투영되고 있었다.

텃밭에는 제법 알차고 싱싱한 고추가 영글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는데 작은어머니는 나에게 대구로 갈 때 가져가라고 하시면서 고추를 따고 계셨다. 한평생 논밭을 일구어 오면서 힘드셨을 법도 한데 아직 마당에 텃밭을 손수 일구고 일하시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그러나 작은아버지와 어머니는 '흙'이 당신들의 삶에 전부라는 것을 몸으로 직접 보여주시는 듯했다. 

간혹 친구들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마당이 있는 주택에 살고 싶다거나 아니면 아이들 다 키우면 시골에서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바꾸어 생각해보면 콘크리트 도시문화에서 벗어나 '흙이 있는 삶'을 살고 싶지만 아이들만큼은 시골에서 살게 하기 싫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교육환경 때문이 아닐까. 물론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 도시의 삶을 동경할 수도 있고 도시 사람들이 시골의 삶을 동경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도시와 시골의 관계를 떠나 한 인간의 삶을 볼 때 '흙이 있는 삶'은 분명히 여유와 평안을 주기에 충분하다.

필자는 10여 년 전부터 취미처럼 발코니에 쑥갓, 깻잎, 고추, 방울토마토 등을 재배하고 있다. 그냥 씨앗에서 새로운 생명이 피어나는 것도 신기했고 자라면서 열매를 맺는 것은 더욱 경이로웠다. 반려동물과 마찬가지로 돌봐주지 않으면 토라지듯 금방 시들해진다. 그리고 토양이나 영양분 햇빛 등 자연조건에 따라 성장과 열매들이 차이가 나타난다. 식물이지만 어린아이 돌보듯 정성을 다해야만 그들도 보답하는 것이다.

5, 6년 전부터는 좀 더 전문적으로 도시 텃밭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지난해 4월에는 방울토마토 모종 2개를 사서 각각의 화분에 심고 쌀뜨물을 준 방울토마토와 그냥 물을 준 방울토마토의 성장과 열매를 비교 실험(?) 해보았다. 실험 결과는 쌀뜨물을 준 방울토마토가 껍질이 좀 더 단단하고 토마토에서 느낄 수 없는 단맛을 내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

마치 식물학자가 된 것처럼 이런 작은 결과에 보람을 느끼기도 하고 자연과 생명의 섭리를 몸소 경험하게 되었다.

올해는 필자가 다니는 교회 공터에 텃밭을 만들기로 교인들에게 제안하고 2주 전부터 곡괭이와 삽을 가지고 서툴지만 신자들과 함께 땅을 개간하고 있다. 30여 명 되는 작은 교회지만 어린이부터 칠순이 넘은 어르신까지 하나가 되어 텃밭에 정성을 들이고 있다. 텃밭이 완성되면 가족 단위나 팀 단위로 분양할 예정이다. 팀별로 텃밭이름도 짓고 작물도 선정할 예정인데 정성껏 키워서 가을이 되면 추수감사절에 수확의 기쁨을 함께 나누려고 한다.

'흙이 있는 삶'은 머릿속에서만 꿈꾸던 이상은 아니다. 4월 첫주가 되면 동네 꽃집이나 전통시장에서 각종 씨앗이나 호박, 고추, 딸기, 방울토마토 등 모종을 쉽게 구할 수 있는데 단돈 1천 원이면 4, 5개 모종을 살 수 있다. 집 발코니 혹은 옥상에 화분이나 재활용 스티로폼 상자를 이용해 올봄 나만의 텃밭을 꾸며 보는 게 어떨까 싶다. 봄은 먼 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집 발코니 혹은 옥상에 그리고 사무실 유리 창가에도 있다.

현종문/대구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 film21c@daum.net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