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을 나서는데 비가 왔다. 봄을 다스리는 비다. 우산을 챙길까 하다가 비옷을 입었다. 손이 자유로워 우산보다 편리하다.
설렁설렁 공원을 거닐다 보니 어렸을 적 생각이 났다. 초등학교 입학 즈음의 일이었을 것이다. 이웃 아저씨가 비밀 을 하나 귀띔해 주었다. 내가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라는 것이었다. 아저씨가 팔달교 다리 밑을 지나는데 국화빵을 굽는 친엄마가 딸이 보고 싶다며 눈이 퉁퉁 붓도록 울더라고도 했다.
나는 고민했다. 사실일까 아닐까. 아저씨가 나를 놀리는 것은 아닐까. 해답은 엉뚱한 곳에 있었다. 봄비가 오는 날이었다. 친구 엄마들은 모두 우산을 들고 마중 왔는데 내 엄마만 학교에 오지 않았다. 가짜 엄마였기 때문일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나보다 동생을 더 예뻐하는 것 같았고 툭 하면 나만 외가로 보내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나는 시름시름 병을 앓았다. 밥도 먹지 않고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시 또 비 오는 어느 날 나는 드디어 중대 결심을 하게 되었다. 다리 밑 친엄마를 찾아가겠노라고.
사춘기 때의 봄비는 영화 '초우'와 연결된다. 출세욕에 눈먼 세차공이 신분을 속이고 주불 공사의 딸에게 접근한다. 그녀 또한 사실은 가정부이다. 두 사람은 부잣집 딸과 도련님이 되어 게임을 하듯 위험한 사랑에 빠진다. 비밀이 밝혀져 좌절한 세차공이 가정부를 심하게 때리며 돌아서는 장면이나 버림받은 여주인공이 비를 맞으며 거리를 헤매는 장면은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가슴에 짠하게 남아 있다. 처음 만난 날 운명처럼 세차공의 시선이 머물렀던 것도 주인 아가씨 몰래 입고 나왔던 레인코트였지, 아마.
중년을 넘긴 나이에도 봄비는 내린다. 치기 어린 비밀 혹은 지독한 절망이 없을 뿐이다. 베일을 벗은 삶은 건조하고 쓸쓸하다. 아픔이 건너간 삶도 허망하기 짝이 없다. 여주인공의 레인코트가 낭만이었다면 내가 입은 허름한 비옷은 생활일 것이다.
봄비에 벚꽃이 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제주도에서 예년보다 열흘이나 빨리 상륙했다고 한다. 만개 아닌 조금 덜 핀 꽃에 유독 눈이 가는 것은 몸의 비밀을 머금고 있기 때문이다. 이 비가 끝나면 봄이 훌쩍 떠나리라 한다. 성급한 꽃들도 화들짝 놀라 낙화를 시작할 것이다.
소진/에세이 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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