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동순의 가요 이야기] 한국최초의 재즈전문 가수 이복본 ①

큰 키에 미남 얼굴, 연극배우로 연예계 데뷔

오늘은 이복본(李福本'1912∼1950)이란 인물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복본'이란 이름은 '후쿠모도'란 일본식 이름으로 여겨집니다.

이복본은 1912년 황해도 연안에서 출생했습니다. 최종 주소는 서울시 중구 명동 66번지로 되어 있군요. 그는 6'25가 일어난 뒤에도 피란가지 않고 전쟁 전부터 자신이 운영해오던 충무로의 식당에서 그대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1950년 8월 5일 오전 8시경 서울을 점령한 북한인민군 정치보위부에서 나왔다는 내무서원이 찾아와 이복본을 체포해서 어디론가 끌고 갔습니다. 죄명은 친일활동, 여기에다 해방 후 이승만 정권의 국방군위문대에서 활약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복본은 그로부터 한 주일 만에 집으로 무사히 돌아옵니다. 미국에 의한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기 직전, 그러니까 9'28수복이 가까워지던 어느 날 이복본은 체포되었을 때 영치된 시계를 찾으러 다시 인민군보위부를 찾아갔다가 그 길로 아주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아무튼 체포된 이복본은 수많은 납치인사들 틈바구니에 끼었고, 인민군 정치보위부는 당시 약 3천 명가량을 납치해 구금해 두었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서울 미아리고개와 영천고개 등 두 루트를 통해 북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 때문에 '단장(斷腸)의 미아리고개'란 말이 생겼지요. 이복본은 의정부 방향으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내외문제연구소가 제공한 '납북인사 북한생활기-죽음의 세월'(동아일보, 1962. 6. 6.) 기사는 이복본이 평안북도 철산광산의 연예서클에 유배되어 최저생활로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가요평론가 황문평의 증언에 의하면 이복본은 북으로 끌려가다가 납치인사들의 관리가 귀찮아진 인민군들에게 서울근교에서 학살당해 그 시신이 중랑천 주변에 버려졌다고 하네요.

황해도에서 태어난 이복본은 일찍이 부모를 따라 서울로 옮겨와서 살았습니다. 어려서부터 키가 남보다 유난히 커서 '겨릅대'로 놀림을 받았습니다. 이런 신체적 조건 때문에 이복본은 1929년 서울 중동고보에 입학해서 학교농구팀의 대표선수로 들어갔습니다. 그해 11월에 고보 대항 농구리그전에 출전해서 경성2고, 중앙고보, 청학고보, 선린상고, 경기상고, 휘문고보, 청우고보, 남상고보 등 여러 학교와 경기를 펼쳤습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31년 고보 대항 농구리그전에서 이복본은 난데없이 삼각고보 대표선수 명단에서 이름이 확인됩니다. 아마도 그의 존재를 탐낸 삼각고보에서 이복본을 스카우트해 간 듯합니다. 중앙기독교청년회원 농구대회에도 선수로 출전한 기록이 보이네요.

키도 컸지만 얼굴의 골격이나 윤곽이 마치 혼혈미남 같은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그 독특함이 마침내 연극배우로 데뷔하도록 이끌었던 것 같습니다.

이복본의 데뷔는 21세 무렵입니다. 1933년 조선연극사 공연무대에 오른 것이 처음이지요. 이후로 1934년 안종화 감독의 영화 '청춘의 십자로'에 이원용, 신일선, 최명화, 양철 등과 함께 출연하며 배우로서 이름을 얻었습니다. 이복본의 명성이 정식으로 언론에 등장하는 것은 1935년 8월 4일 경성방송국 밤 9시 10분에 방송된 경성방송국(JODK) 라디오 코미디프로 '유선형(流線型) 결혼생활 전경'입니다. 당시 이복본의 소속은 서울의 극단 '무랑루쥬'였습니다. 출연 배우는 모던보이 이복본과 그의 처 전춘우, 또 그의 동무 노재신과 개똥어멈 김길순 등입니다. 이 중 노재신(盧載信)은 바로 배우 엄앵란의 어머니이지요. 1935년에는 나운규가 직접 감독한 영화 '무화과'와 '그림자'에 윤봉춘, 현방란 등과 함께 출연했습니다.

영남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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