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신안군의 섬마을 사람들은 시금치를 섬초라 부른다. 노지 재배한 시금치를 상표 등록을 할 때 좀 튀는 이름을 갖다 붙인 것이 '신안 섬초'가 되었다. 섬초는 맛이 유별나다. 겨울 내내 차가운 해풍을 알몸으로 맞고 눈 서리를 이불 삼아 덮고 지낸 인고의 세월이 맛으로 거듭난 것이다.
섬초는 내륙의 시금치와는 맛이 판이하게 다르다. 일반 시금치는 키대로 일어서서 기립 식으로 자란다. 그러나 섬초는 바람을 피하기 위해 납작 엎드린 포복자세로 성장한다. 키 대신에 몸집을 불린 섬초는 잎에 살이 많아 달고 맛이 있다. 섬초는 밤안개가 염분 섞인 습기를 밤마다 뿌려주기 때문에 농약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항암 식품이다.
섬초를 본격적으로 재배하고 있는 신안군의 비금면과 도초면은 아직 가보지 못했다. 1천4개의 섬들이 널려 있는 신안 바다의 섬들을 조바심하거나 크게 안달하지 않고 하나하나 점령해 가고 있으니 늦어도 내년쯤엔 도초도에 들어가리라 생각하고 있다. 그곳에 가면 주변 바다에서 잡히는 고기들로 생선회 한 접시 올린 다음 섬초 한 양푼을 심심하게 무쳐 배부르도록 먹어봐야겠다.
해풍 맞은 겨울 시금치를 생각하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추봉도 생각이 난다. 추봉도는 이순신 장군의 나라 사랑 얼이 스며 있는 한산도의 바로 코앞에 있는 아름다운 작은 섬이다. 한산도 제승당 선착장에서 왼쪽 능선으로 올라가 세 시간쯤 걸으면 한산읍에 이른다. 이 산행 코스가 알려지기 전에는 능선 위로 나있는 토끼길이 켜켜로 쌓여 있는 소나무 낙엽으로 쿠션 좋은 양탄자 위를 걷는 듯했다.
이 코스를 걷고 난 후엔 삐걱거리는 전마선을 타고 추봉도로 건너가 미리 주문한 생선회와 참기름으로 잘 무친 시금치를 밥 대신에 먹곤 했다. 우리 일행들이 자주 드나들었던 동백장 여관의 주인 박분임 여사는 마음씨가 좋아 무엇이든 원하는 것은 죄다 이뤄주었다.
한 번은 "한산도 망산 정자 위에서 생선회를 먹고 싶다"고 했더니 "날짜만 잡으면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했다. 그 약속은 한 달 뒤에 지켜졌다. 그 집 아들이 오르막 임도를 따라 생선회를 오토바이에 싣고 온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부하들이 노심초사하며 망을 보던 그 망루 자리에서 잡어 회를 먹었던 기억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고 있다.
여수 금오도에 가지 않았으면 방풍나물을 맛보지 못할 뻔했다. 앞서 말한 섬초는 시사주간지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 10대 건강식품에 들어간다. 그렇지만 방풍나물은 머위, 취나물, 땅두릅과 함께 금오도 4대 명품나물이다. 이 나물은 풍(風)을 막아주는 나물로 약효가 만만찮은 신비의 식물이다. 방풍나물은 중국이 원산지인 원방풍, 바닷가에 자생하는 해방풍, 자생종을 밭에서 기른 식방풍으로 나눌 수 있다. 섬이라고 방풍나물이 무진장 서식하거나 길러지지는 않는다. 이곳 금오도와 태안 지역이 우리나라 방풍 생산의 95%를 담당하고 있다. 방풍나물은 상추처럼 부드럽지 않지만 씹으면 쌉싸래한 맛이 구미를 당기게 한다. 섬사람들은 손바닥에 방풍나물을 펴놓고 생선회와 된장, 풋고추, 마늘을 얹어 입이 터질 듯이 쌈을 싸먹는다. 더러는 녹즙을 짜 먹기도 하고 부침개를 부쳐 먹기도 한다. 일 년에 다섯 번 정도 수확하는 방풍나물은 값도 짭짤하게 비싸 이곳 섬사람들의 소득원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방풍나물은 의지의 식물이다. 바람 맞이 언덕에 씨가 뿌려져 뿌리가 내려지면 그때부터 고난의 일생은 시작된다. 방풍도 섬초처럼 키를 자랑하지 못하고 엎드려서 자란다. 섬초는 고난의 세월을 달착지근한 맛으로 보상받지만 방풍나물은 눈 서리 긴 세월을 이겨낸 값을 약효로 받아낸다. 방풍나물은 우선 열을 내려주고 습한 기운을 제거해 주며 통증을 완화시켜 주는 효과가 있다. 그것보다는 36가지로 꼽을 수 있는 각종 풍을 예방해 주는 신비한 효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고 있으며 그 믿음을 나물과 함께 섞어 팔고 있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3월 초순에 금오도에 들어갔다. 여수 돌산 신기항에서 금오도 여천항으로 가는 아침 7시 45분에 출발하는 첫 배를 탔다. 바깥 날씨가 너무 추워 부둣가 으슥한 곳에서 라면 끓일 계획을 포기하고 남면 내외진 마을의 상록수식당(061-665-9596)으로 들어간 것이 방풍나물과의 첫 만남이었다.
시래기국과 깔다구(농어 새끼)조림을 비롯하여 섬에서 나온 온갖 나물 무침들이 한 상 그득했다. 처음 먹어보는 방풍나물을 두 번이나 앙코르를 청했다. 값은 1인분 8천원.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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