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행복을 여는 효제상담뜨락] 로마 귀족의 미식향연과 폭식강박

꽤 오래전 일이다. 필자의 상담뜨락에 마치 '공' 하나가 굴러 오듯 착시현상을 주는 여대생이 찾아왔다. 부모의 하소연대로 그녀는 과체중에다 균형을 잃어버린 인형처럼 불안정했다. 그 당시 그녀는 정신과 치료와 함께 가족 치료를 받으러 필자를 찾은 것이다.

그때, 그녀가 한 달간 소비한 인스턴트 음식값은 웬만한 사람의 한 달치 봉급 수준이었다. 지출된 돈만큼이나 먹는 양도 엄청났다. 컴퓨터로 밤낮이 바뀐 낮부터 그녀의 화려하고 성대한 식사는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우산만 한 피자와 커다란 병의 음료를 들이켠다. 삽시간에 그 많던 음식을 삼키듯 먹어치우고는 다시 돌솥 비빔밥을 먹는다. 위에서 통증마저 살살 느끼기 시작할 때쯤, 그녀는 두둥실 부풀어 오른 배 둘레를 느끼고 화장실로 가 구토를 시작한다. 그리고 음식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자기를 구토물만큼이나 증오하며 후회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허전함과 공허를 느끼며 찜닭 한 마리를 시켜 먹는다. 그리고 곧 있을 친구모임을 떠올리고는 다시 화장실로 들어가 구토를 반복했다는 게 아닌가. 그녀는 그렁그렁 고이는 눈물을 참으며 과거생활을 고백하듯 필자에게 털어놓고 하던 말을 마쳤다.

이 기막힌 소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노라니, 필자의 머리에 갑자기 고대 로마의 '미식을 위한 귀족들의 향연'이란 장면이 떠올랐다. 세네카의 저서 '서한'에서는 로마 귀족들은 하루 수십 가지 산해진미가 넘치는 대여섯 끼 이상의 식사 향연을 베풀고 또 다른 음식을 맛보기 위해 먹었던 음식을 일부러 구토하며 위 속을 비워 새 음식을 다시 맛보았다고 한다. 그들은 살기 위해 먹었다기보다 먹기 위해서 살았던 사람들처럼 느껴진다.

필자의 내담자도 누군가가 그녀에 대해 이해 없이 본다면, 공처럼 부풀려진 몸과 그 공만큼이나 커져 버린 공허로 날마다 로마 귀족들처럼 산해진미의 향연을 벌이고 또 다른 미식을 위해 힘겨운 구토를 반복했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필자는 안다. 그녀의 음식 먹기와 반복되는 구토는 먹기 위해 살았던 로마 귀족의 모습이 아니라 살기 위해 먹고, 살고 싶어 구토하는 어린 피해자의 모습이란 것을. 그때 필자는 자아상이 왜곡되어 나타난 그녀의 강박적인 행동에 대해 무의식적인 정신역동의 한 모습인 '분열'(splitting)과 '투사'(projection)를 다루어 주었음은 말할 나위 없었다.

대구과학대 교수

대구복지상담교육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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