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화가와 오만원

오만원권 사랑이 애절하다. 시중에서 보기가 힘들다고 한다. 배추 이파리 색보다 황금색에 더 끌리는 것은 어린아이도 마찬가지다. 지폐 색을 보고 무슨 심리치료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단지, 오만원권에 등장하는 인물에 주목해보자는 것이다. 그 주인공이 유학자 율곡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이라는 것쯤은 누구나 안다. 하지만 그녀가 뛰어난 화가라는 사실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신사임당은 어릴 때 산수화의 대가인 안견(安堅)의 그림을 보고 사숙했다고 전해진다. 작품으로는 '초충도'(草蟲圖)를 비롯해 다양한 소재의 그림이 있다. 그녀의 작품은 여성 특유의 시선으로 소소한 광경을 세밀하게 표현한 점이 압권이다. 잔잔한 풍경에 애정을 기울였다.

'초충도'는 8폭의 그림으로, '수박과 들쥐' '가지와 방아깨비' '양귀비와 도마뱀' '오이와 개구리' 등이 있다. 제목만으로도 앙증스러움이 느껴져, 저절로 입가에 웃음을 머금게 한다. 그림의 구도 또한 간결하여 우리의 정서를 맑게 밝혀준다.

그중에서도 '수박과 들쥐'는 벌건 대낮에 생쥐 두 마리가 수박 서리에 나선 그림이다. 생쥐는 가장 크고 터질 듯 여문 수박에 '작업'을 걸었다. 주인이 오기 전에 해치워야 하는 긴박감마저 감돈다. 햇볕이 내리쬐는 여름 한낮, 복이 넝쿨째 굴러온 셈이다. 간이 큰 생쥐에 비해 하늘에는 한 쌍의 나비가 한가롭다. 빨간색의 나비와 흰색 바탕에 초록 무늬가 화려한 나비는 생쥐의 수박 서리는 안중에도 없다. 오로지 둘만의 시간이 즐겁다. '슬로 라이프'(Slow life)다. 여유롭게 비행하며 꽃향기에 젖는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 행복하다. 화면 오른쪽에는 두 그루의 붉은 꽃이 함초롬히 서 있다. 역삼각형 구도로 배치된 붉은 나비와 붉은 꽃, 수박의 붉은 씨앗의 조화가 절묘하다. 붉은색이 그림에 경쾌함을 더한다. 생쥐의 수박 갉아먹는 소리와 나비의 여유로운 날갯짓 소리가 들릴 듯한, 소박하면서 평화로운 정경이다.

신사임당은 우리나라 지폐에 그려진 최초의 여성이자 여성 화가이다. 아들 이이는 오천원권 지폐의 주인공이어서, 모자가 나란히 지폐의 모델 자리를 꿰찼다. 이것도 기록감이다.

우리나라에서 여성이 화가로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 끊임없이 남성 위주의 사회적 통념과 부딪히며 자신의 입지를 다져야 그나마 인정받을 수 있다. 오늘날 상황이 이럴진대, 유교가 지배한 조선시대에 여성이 그림을 그리고 화가로 이름을 알린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다. 선배 화가로서 신사임당의 그림이 빛나는 것은 그녀가 시대의 어둠과 맞서며 개성적인 화가로 자신의 길을 개척했기 때문이다.

한 번쯤, 여유를 갖고 돈 감상을 해보자. 그러면 오만원어치 이상의 크고 치열한 예술혼을 만날 수 있다.

김남희 화가 2572k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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