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칼럼] 도산에서 피어나는 매화 향기

올해는 봄이 빨리 찾아왔다. 봄꽃의 개화 시기가 여느 해보다 무척 이르다. 차례차례 피어나던 봄꽃들이 거의 동시에 피어나고 있다. 서울 여의도 벚꽃도 3월 말에 화사한 자태를 자랑하기 시작했다. 서울지역의 벚꽃이 3월에 핀 것은 기상관측이 시작된 이래 처음이라 한다.

봄꽃이 이처럼 시차를 두지 않고 한꺼번에 피게 되면 사람들의 눈길은 벚꽃을 비롯하여 개나리나 목련처럼 화려한 색상으로 자태를 뽐내는 꽃들로 향하게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예년에 이들보다 먼저 꽃망울을 터트렸던 새봄의 전령 매화가 올해는 덜 주목받는 것 같다. 설중매(雪中梅)라는 말도 있듯이 매화는 겨울철이 지나자마자 아직 잔설이 희끗한 이른 봄에 봄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해주는 꽃이다. 나무가 크지도 않고 꽃도 그다지 화사하지 않지만 추운 겨울에도 얼지 않고 있다가 올곧게 꽃망울을 터트리는 절개의 꽃이다.

그래서 선비들은 난초, 국화, 대나무와 함께 매화를 사군자(四君子)라 하여 아끼고 가까이하였나 보다. 그 가운데도 엄동설한이 지나면서 가장 일찍 피었던 매화가 더 고마운 손님같이 느껴졌으리라.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은 이런 매화 향기를 '암향'(暗香)이라 즐겨 표현했다. 강하지도 그렇다고 다른 것에 묻히지도 않는 은은함을 높이 산 것이다. 매화의 맑은 향내가 예로부터 선비들의 사랑을 받은 이유이다.

역사상 매화를 가장 사랑한 선비는 퇴계 선생이었다. 그의 매화 사랑은 각별했다. 선생이 얼마나 매화를 사랑했는지는 그가 매화를 '매형'(梅兄)이라 부르며 친구처럼 대하고, 매화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혹애'(酷愛) 즉 '지독한 사랑'이라고 표현한 사실로부터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매형'이라는 호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매화를 의인화하여 시를 주고받았고,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도 화분의 매화에 물을 주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였다.

매화에 대한 선생의 '지독한 사랑'은 무엇보다 그의 매화 시에서 잘 드러난다. 선생은 70평생 모두 75제(題) 107수(首)의 매화 시를 남겼고, 그 중 91수를 모아 손수 '매화시첩'을 엮었다. 이 가운데 78수가 60세 이후의 작품이며, 그 가운데 또 절반(39수)은 별세하기 전 마지막 2년 동안에 지은 시들이다. 만년으로 갈수록 매화에 대한 깊은 사랑과 관심을 더 많이 담아냈다는 점에서 매화야말로 선생 만년의 정신세계를 잘 보여주는 징표라 할 만하다.

50대 이후 벼슬길에서 물러나 계상서당과 도산서당을 차례로 지어 제자를 길렀던 선생은 거처하는 곳마다 매화를 심었다. 특히 도산서당 한 쪽에 소나무, 국화, 대나무와 함께 매화를 심고서는 이를 절우사(節友社)라 불렀다. 그리고는 같은 제목의 시를 지어, 중국의 전원시인 도연명(陶淵明)은 소나무와 국화, 대나무만 심었지만 자신은 그 곧은 절개와 맑은 향기를 너무도 잘 알기에 매형과도 함께 벗을 삼겠노라며 은근히 자부하였다.

퇴계 선생이 말년에 거처했던 도산 언덕에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매화가 지금 한창이다. 선생은 갔어도 매화향은 아직 남아 오늘도 은은히 선생의 향기를 전하는 듯하다.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도 우리네 삶은 갈수록 허기가 지고, 그에 비례하여 사람다움의 향내가 갈수록 그리워지는 세태 속에 살고 있다. 이럴 때 한 번 도산을 찾아 매화꽃 향기(花香)와 함께 선현의 향기(人香)를 함께 느껴보면 삶이 얼마나 윤택해질까?.

선생이 돌아가신 지 222년이 흐른 1792년 지금처럼 매화가 한창인 봄철에 정조대왕은 선생의 학덕을 기려 도산서원에서 특별히 과거시험(도산별과)을 치르게 했다. 당시 시험에 7천200여 명의 선비가 응시했다고 하니, 수행한 사람까지 합치면 1만여 명이 넘는 인파가 서원 앞 낙동강변 백사장을 메웠을 것이다. 이들을 끌어들인 힘은 무엇이었을까? 퇴계 선생이 남긴 사람의 향기가 아니었을까?

올해는 공교롭게도 도산별과가 거행된 지 다시 222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여 222년 전 바로 그날에 맞추어 이달 23일과 24일 이틀 동안 도산서원에서는 '도원상매'(陶院賞梅) 즉 '도산서원에서 매화를 감상하다'라는 주제 아래 사당고유와 한시백일장 등의 재현행사가 열린다. 정신적 삶의 윤택함에 관심 있는 많은 분들이 찾아와 매화 향기와 사람 향기를 한껏 맛보시기를 권하고 싶다.

김병일/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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