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서각의 시와 함께] 찬비 내리고―편지 1

나희덕(1966~ )

우리가 후끈 피워냈던 꽃송이들이

어젯밤 찬비에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아프지도 못합니다

밤새 난간을 타고 흘러내리던

빗방울들이 또한 그러하여

마지막 한 방울이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

공중에 매달려 있습니다

떨어지기 위해 시들기 위해

아슬하게 저를 매달고 있는 것들은

그 무게의 눈물겨움으로 하여

저리도 눈부신가요

몹시 앓을 듯한 이 예감은

시들기 직전의 꽃들이 내지르는

향기 같은 것인가요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마음껏 향기로울 수도 없습니다

-창비시선 『봄은 언제나 되살아난다』, 2000.

공중에 매달려 있는 빗방울은 아름답다. 빗방울은 왜 저토록 이름다운가에 대한 대답이 이 시다. 빗방울은 언젠가 떨어질 것이다. 빗방울이 떨어지면 당신이 아파할 것이다. 당신이 아파할까 봐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다. 온몸으로 무게를 견디며 추락하지 않으려는 눈물겨운 당신에 대한 배려가 눈부신 빗방울의 아름다움이다. 이렇듯 사랑은 사랑하는 이에 대한 헌신이요 자기희생이다.

아름다움은 꾸미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아름다움이 스스로 드러나는 것이다. 내면의 아름다움은 아무리 감추려 해도 눈 밝은 사람들이 용하게 알아내고 찾아낸다. 시인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 아름다움을 찾아 길을 떠나는 순례자이다. 빗방울 하나에서 당신을 향한 사랑의 절실함을 읽어내는 시인의 섬세한 감각이 놀랍다.

권서각 시인 kweon51@chol.com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