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나리 노란 꽃물 터져 흐르던 어느 봄날, 김 박사가 드디어 슈퍼 로봇 청소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지난 수년간, 연구실에서 살다시피 하며 수없는 실패를 거듭한 끝에 고안해낸 발명품입니다. 미국 박사까지 따온 양반이 기껏 청소기 만드는 일이냐고, 혹시 조상 중에 청소하다 돌아가신 분이 있는 건 아니냐는 빈정거림까지 받아가면서도 박사님은 이 일을 필생의 과업으로 생각하고 꿋꿋하게 매달려왔습니다. 청소란 마음속에 쌓인 온갖 티끌과 먼지를 털어내는 일로서 인간 수행의 기초과정이라는, 선불교의 화두를 과학적으로 실현해 보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김 박사는 자신의 청소기에 '정토사'(淨土師)라는 직함과 아울러, 세상의 먼지를 모두 탈탈 털어내라는 뜻으로 '탈탈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김 박사가 만든 '탈탈이'는 정토사라는 직함이 어울리게 몇 가지 특별한 재주를 가졌습니다. 우선 자율적 실천력이 인간보다 더 높은 수준입니다. 미리 입력해둔 회로를 따라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종래의 청소기와는 달리 '탈탈이'는 스스로 더러운 곳을 찾아 거울 속처럼 깨끗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강력한 흡인력으로 집적기에 쌓인 먼지나 쓰레기들의 성분을 세밀히 분석하여 집안의 청결 상태와 그 원인은 물론, 식구들이 걸리기 쉬운 질병 정보까지 알려줍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공중에 날아다니는 거짓말을 개구리가 파리 잡듯 낚아채어 분석해 보고, 새빨간 거짓말을 상습적으로 내뱉는 사람을 끝까지 찾아내어 그의 가슴이나 머릿속에 쌓인 쓰레기를 털어내는 재주까지 지녔습니다.
사나흘 찔끔대던 비가 그치고 모처럼 따스한 햇볕이 집안을 기웃대던 날이었습니다. 김 박사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베란다 유리창과 방문, 현관문, 심지어는 화장실 문까지 문이라는 문은 다 열어 봄기운을 집안으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기능 점검을 위해 '탈탈이'를 풀어두고서는 거실 안락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봄바람과 노닥거리며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습니다.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6'4 지방선거 입후보자들의 침을 튀기는 설전과 소위 정치해설가들의 방담이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무슨 놈의 애국자가 저렇게 많고 또 해설 전문가의 혓바닥은 어찌 저리도 현란한지….'
얼마나 지났을까, 깜박 졸음에서 깨어난 박사님의 눈에 '탈탈이'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박사님은 벌떡 일어나 안방으로, 건넌방으로, 서재로, 주방으로 '탈탈이'를 찾아 뛰어다녔습니다. "정토사 님! 정토사 님!" 화장실로, 베란다로, 침대 밑으로 발을 동동 구르며 쫓아다녔지만, 어디에도 '탈탈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문득 현관문을 열어두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습니다. '정토사 님이 가출을 하셨구나!' 박사님은 허둥지둥 신발을 꿰차고 집을 나섰습니다. 엘리베이터 문 앞에 '탈탈이'의 손가락 하나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계단을 내려가다 굴러 떨어지신 게야.'
1층까지 내달려 경비실 할아버지를 붙잡고 물어봐도, 빈 상자를 주워 나르는 할머니께 물어봐도, 놀이터 아이들에게 물어봐도 모두 모른다고 했습니다. 골목 입구 슈퍼 아주머니도, 약국 아저씨도, 마을버스 기사도, 길가의 가로수도, 언덕의 목련도 모두 고개를 저었습니다. 고개를 저을 뿐 아니라, 대낮에 정토사라니 머리가 팽 돌아버린 사람이 아닌가 하고 수군대기까지 했습니다. 몇 날 며칠을 부모 잃은 아이처럼 거리를 헤맸습니다. 가출 신고를 위해 찾아간 지구대에서 로봇은 가출 신고 대상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싸우기도 했습니다.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며 자리에 누워, 지는 꽃잎처럼 떨어져 내리던 김 박사는 어느 날, 텔레비전의 이상한 뉴스를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금 이상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선관위의 발표에 따르면, 앞다투어 자기가 적임자라며 출마를 선언했던 유명 인사들이 최근 하나 둘 자신은 결코 적임자가 아니라며 사퇴하는 바람에 입후보자가 절대 부족하여 선거를 치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합니다." 김 박사는 헐레벌떡 집을 나서며 중얼거렸습니다. "여의도로 가신 게야. 틀림없어."
김동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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