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로마올림픽 마라톤에서 아베베 비킬라의 맨발은 큰 화제를 불렀다. 아프리카인 최초의 올림픽 마라톤 우승이다. 당시 순간을 담은 흑백사진 한 장이 주는 묘한 대비가 기억에 생생하다. 결승선 부근에서 카메라를 들고 선 기자, 경찰, 진행요원의 중절모와 반짝이는 구두, 아베베의 거친 맨발이다.
"내가 바란 것은 그저 달리는 것뿐이다. 내 나라가 강인하게 시련을 이겨냈음을 알리고 싶었다"는 소감에서 50년 세월의 공백을 뛰어넘어 맨발에 담긴 의미를 되새김해볼 수 있다. 문명과 규범, 억압과 저항이라는 정치'문화적 함의가 맨발에 고스란히 투영된다. 지리적'환경적 요인도 무시할 수 없지만 아프리카의 암울한 현실을 맨발과 오버랩시키는 게 더 자연스럽다.
비슷한 사례로 히피(Hippie)의 맨발이다. 1960년대 히피족은 샌들이나 맨발을 선호했다. 기성세대와 질서에 대한 저항의식이 맨발이라는 탈 사회적 행동으로 표출됐다. 긴 머리와 치렁치렁한 목걸이, 미니스커트 등 히피족을 상징하는 차림새는 많지만 맨발은 가장 극적인 행위 양식이다. 맨발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인 자유와 평등, 야만을 상징했다. 이슬람 성전을 찾는 무슬림이 손과 입, 발을 물로 씻는 것은 세속과의 단절 의식이다. 고대 동양에서는 죄수의 머리를 풀어헤치고 맨발로 걸렸다. 이는 격식의 해체나 박탈을 뜻하는 상징이자 부와 권세 등을 모두 빼앗아 원상태로 되돌려놓는다는 차원이다.
도시와 시민의식이 극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한 서구사회는 맨발을 억눌렀다. 발에 헝겊을 씌우고 가죽으로 만든 구두로 격식을 따졌다. 발은 복식의 출발이자 문명을 야만과 가르는 경계점이다. 개화기 양말이 이 땅에 상륙하면서 서양 버선이라는 뜻의 양말(洋襪)이라는 한자 조어가 생긴 것도 시대의 변화상이다.
'황제 노역'으로 물의를 일으킨 허재호 전 회장이 그저께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한 후 아파트 분양 피해자들에 의해 승용차에 갇힌 장면이 보도돼 눈길을 끌었다. 맨발에 책상다리를 한 사진이다. 그의 맨발은 패가망신한 한 기업가의 초상이지만 법대로 해보라는 엇나간 오기가 엿보인다. 사과하러 왔다가 함정에 빠진 것 같다는 발언도 기가 막힌다. 기업을 망치고 숱한 피해자를 낳은 범죄자의 맨발은 차라리 기유차리(豈有此理)다. 어찌 이런 도리가 있을까 싶다.
서종철 논설위원 kyo425@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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