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겨울나무'가 생각났다. '나무야 나무야 겨울나무야, 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아무도 찾지 않는 추운 겨울을, 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느냐?' 이원수 작사, 정세문 작곡의 이 노래가 갑자기 떠오른 것은 꽃샘바람 탓인지 날씨가 한겨울로 돌변했기 때문이다. 개나리도 노란 꽃을 다 떨어뜨리고 푸른 잎사귀로 가득 몸을 채운 이 한 봄에!
'겨울나무'가 뇌리를 뒤흔든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내가 사는 작은 빌라 둘레에서 위용을 뽐내던 일곱 그루 거대한 히말라야시다들이 돌연 자취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김영랑이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라고 노래한 것처럼, 빌라 지붕보다도 더 높이 자라 있던 히말라야시다들이 전기톱에 몽땅 잘려나가 버렸으니!
앞으로는 겨울이 와도 히말라야시다들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찬바람을 맞고 서서 빌라 마당의 한기를 막아주던 그 나무들은 영원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자연 속에 깃들어 있는 기운생동(氣韻生動)의 본질적 가치를 일반인들보다 먼저 깨닫고, 그것을 형상화하여 작품을 창작하는 예술가의 마음은 죽어버린 나무 앞에서 너무나 애잔해진다.
예술은 움직임에서 태어난다. 하늘과 땅 사이를 흐르는 신묘한 흐름, 그 흐름의 조화로운 질서, 그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변화해가는 만물의 생성을 예술가는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그 받아들임이 체화되면 예술가는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악음을 짓고, 춤을 춘다. 그러므로 움직임이 없어지면 천지도 죽고 예술도 탄생할 수가 없다.
이런 인식은 서양 철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천지를 대우주(Makrokosmos), 사람을 소우주(Mikrokosmos)라 불렀다. 현대의 베르그송도 '우주의 리듬이 바로 인생의 리듬'이라고 했다. 고흐는 공간을 하나의 역동적인 유기체로 그려내었고, 고갱과 마티스는 자연을 정신화했다. 그들은 자연에서 느끼는 직접적인 정감에서 사물의 본질을 추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감정이 일으키는 생동에서도 본질을 추구했다. 그리하여 입체파와 표현파가 탄생했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 예술은 움직이는, 즉 살아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태어난다. 이는 예술 교육 중시가 곧 인성교육 실천이라는 뜻이다.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 조금씩 새순이 돋고 꽃잎을 피워가는 식물, 이곳저곳 돌아다니기도 하고 처마 밑 양지에서 졸기도 하는 고양이… 등을 해칠 마음 없이 바라볼 줄 아는 마음을 기른다면, 예술가는 되지 않더라도 최소한 예술을 즐길 줄 아는 문화인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꽃을 꺾고, 나무를 베고, 가축 아닌 동물을 우리에 가두어 두어서는 안 된다. 그런 행위는 일방적 지배 의식의 소산으로, 인성을 거칠게 한다. 식물에 생명의 움직임이 없다고 생각하여 처음에는 꽃을 꺾고, 그다음에는 덩치가 더 큰 나무를 베고, 이윽고 몸체가 움직이는 동물을 죽이는 것이 순서이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벌어질 일은 자명하지 않나? 살인과 전쟁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언론은 전국 아이들 중 스마트폰을 가장 많이 소유하고 있고, 중독자가 가장 많은 곳이 대구라고 보도한다. 생명이 없는 기계에 삶을 빼앗겨버린 비인간화가 그만큼 심각하게 진행되었다는 지적이다. 누구에게나 하루는 24시간이므로, 대구 아이들이 스마트폰에 그토록 중독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지역 아이들에 비해 예술과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는 방증이다.
식물과 동물에 내재된 자연의 움직임을 깨우치고 사랑하는 마음교육이 필요하다. 그 체험을 글로 쓰고, 그림으로 그리고, 탄성을 노래하다 보면 생명을 존중할 줄 알고, 자연의 모든 만물에 깃들어 있는 조화의 원리에 따라 평화롭게 살아가는 공동체 정신을 지키면서 살아갈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다.
'겨울나무' 노랫말은 아이가 나무를 걱정하는 내용이다. 동양식으로 말하면 기운생동의 관점이고, 서양식으로 말하면 감정이입설의 원용이다. 나무 걱정이 곧 사람 걱정이라는 말이다. 나무를 베고 나니 주차장이 넓어졌다며 흐뭇해하기보다는 겨울나무를 안타까워하며 노래를 부르며 사는 것이 훨씬 인간다운 삶이다.
정연지 화가 gogoyonj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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