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별별세상 별난 인생] 달성 무등교회 이종호 목사

낭랑한 소리에 반해…20년째 대금 부는 목회자

달성군 하빈면 무등리.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마을 앞 들판에서 낭랑한 대금소리가 울려 퍼진다. 대금 특유의 구성진 가락이 정겹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대금소리의 주인공은 무등교회 이종호(48) 목사다. 목사와 대금, 이색적이다. 어릴 적 소먹이며 풀피리 불던 소년이 목사가 돼 대금을 연주한다.

◆목사와 대금

이종호 목사는 대금을 사랑하는 국악 마니아다. 평소 개량 한복을 즐겨 입으며 얼굴 표정도 인자한 모습이다. 그는 "서양음악도 좋지만, 우리 고유의 국악은 인간 내면의 세계를 풀어내 듯 삶에서 묻어나는 진솔한 향기와 멋이 우러난다"고 강조한다. 이 목사가 대금을 둘러메고 밖으로 안내한다. 대금연주 장소로는 들판에 있는 정자가 제격이지만, 오늘은 마을 앞 논두렁에 자리 잡는다. 눈을 지그시 감고 대금연주를 시작한다. 주요 연주곡은 찬송가와 복음성가 위주다. 자연스럽게 전통가요로 이어진다. 대금연주 실력은 수준급이다.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 성, 오~ 거룩한 곳 아~버~지 집~' '콩밭 매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봄기운이 완연한 들판에 울려 퍼지는 낭랑한 대금 소리가 신비롭다.

대금에 무지한 기자가 들어도 거의 전문가 수준이다. 오랫동안 연주해 온 내공이 느껴진다. 이 목사는 평소 교회 주요행사 때 연세 많은 성도들에게 구수한 대금을 연주한다. 가장 즐기는 연주곡은 영화 서편제에서 선보인 '천년학'이라는 곡이다. 대금 전공자들이 연주하는 곡이지만 이 목사는 감정을 담아 능숙하게 연주한다. 이 목사는 "요즘은 대금을 연주하는 목사님이 많다"며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히려 국악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 안타깝다"고 말한다.

그는 "미국 찬송가에도 아리랑 곡이 있어요. 아쉽게도 우리나라는 교회에서 서양악기 연주에는 익숙하면서도 국악 연주라면 조금 어색하게 생각하는 현상이 있다"고 토로한다. 이 목사는 요즘 이런 문화적인 격차를 좁히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 목사의 고향은 경남 거제 외간 작은 농촌 마을이다. "시골에서 자라면서 봄이면 물오른 수양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만든 버들피리를 삘~릴~리 불던 것이 유일한 음악이자 놀이였다"며 "그땐 그것이 풍류였고, 그 시대의 음악이었다"고 회상한다.

◆대금과의 인연

이 목사가 대금소리를 처음 만난 것은 청년 때 우연하게 이루어졌다. 군 제대 후 마산에서 직장생활 할 때 친구와 함께 창포동 거리를 걷다가 전통찻집에 들어갔다. "조용한 분위기에 친구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데 음악 속에서 흘러나오는 이상한 소리에 매료됐습니다.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아! 참 좋다. 이런 음악도 있었구나'하며 묘한 감성이 생겼습니다." 그땐 그 음악이 대금소리라는 것을 몰랐다. 그 소리가 그리워 그 전통찻집을 자주 찾아가면서 나중에야 심금을 울리는 그 소리의 주인공이 '대금'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이 목사는 "기묘한 그 소리에 이끌려 '나도 저 악기를 불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솟았다"고 회상한다. 당장 악기점을 전전하며 대금을 찾았다. 어렵게 한 악기점에서 대금을 만났다. 이것이 대금과의 첫 인연이었다. 하지만 대금은 결코 만만한 악기가 아니었다. 의욕이 앞서 대금은 샀지만 소리를 내는 방법을 몰라 난감했다. 서점으로 달려가 대금 교재를 샀다. 때마침 그 대금 교재에 찬송가가 실려 있었다. 평소 즐겨 부르던 찬송가라 교재에서 설명하는 대로 손가락 짚는 법 등 연주하는 법을 무작정 따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어설픈 소리였지만 점차 대금소리의 매력에 빠져들면서 국악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대금과 사랑에 빠지다

대금을 한 곡 불어달라고 요청했다. "대금을 불기 시작한 지도 벌써 20여 년이 되어가지만, 아직 대금의 참소리를 낼 수 있는 실력이 안 된다"며 "대금을 제대로 불려면 고통의 시간을 감내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아마 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소리이기에 쉽게 제소리를 내주지 않는 것이라 여긴다"고 해석한다.

이 목사는 목회자가 된 후에도 늘 대금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이라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목회자의 길을 가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망설이다가 입대를 했다. 제대 후에도 취업해 직장생활을 하는 등 다른 길을 걸었다. 하지만 결혼 후 신학교에 입학했다. 결국, 예정한 대로 목회자가 되었다. 목사가 된 후 '찬송가에 순수하게 한국음악을 적용하면 더 멋진 찬송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평소 즐겨 연주해온 대금을 찬송가에 접목했다. 신학교 졸업 논문도 '국악 찬송가'에 대한 내용이다.

이 목사가 목회활동을 하면서도 늘 대금을 손에 놓지 않고 즐겨 연주해온 이유가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제게 대금을 가르쳐 준 선생님을 잊을 수 없어요. 그분은 당시 신부전증으로 투병하면서도 악보에 얽매이지 않고 '입에서 입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는 '구심 전수'의 정의를 확실히 가르치신 분으로 기억한다. 이 목사는 대금에 대한 확실한 신념이 있다. "우리 선조들이 대금을 통해 전해 주고자 한 것은 '허허롭되 공허하게 살지 않으며, 세상 속에서도 고매한 매화처럼 순수하게 옹골찬 모습으로 살라'는 '선비 정신'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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