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밑줄 쫙∼ 대구 역사유물] (15)산격동 연암산 석기 제작장

선사시대 미니 도끼 전문 산업단지…전문 수공업 집단 등장 증거

1968년 대구시 북구 산격동 연암산 한 모퉁이. 한 소장 고고학자의 시야에 돌무더기들이 들어왔다. 구릉을 덮은 수백 점의 박편들. 자연석과는 확연히 다른 그 무엇, 인공이 가해진 돌, 그릇, 파편들이 분명했다.

석재를 수습하던 고고학자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홈자귀(有溝石斧, 미니 도끼의 일종)들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형태를 갖춘 것만 무려 100여 점. 미완의 석부까지 합치면 300점이 넘는 규모였다. 한 마을의 수요를 훨씬 초과하는 양. 그는 이곳이 석기 제작장임을 한눈에 알아차렸다.

그래도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보통의 석기 제작장은 도끼, 화살촉, 돌칼, 방추차 등 생활도구들이 모두 망라되는데 여기서는 유독 작은 도끼라 불리는 홈자귀만 대량으로 발견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도끼 전문 제작장? 선사시대 '홈자귀 특구' 연암산으로 떠나보자.

◆연암산 근처는 대구 선사문화 태동지=연암산은 경북도청 바로 뒷산으로 금호강, 신천, 동화천과 침산을 아우르는 위치에 있으며 천혜의 지세를 자랑한다. 영천을 지나온 금호강이 바로 밑에서 동화천과 합류하고 대구 도심의 자양분인 신천이 턱밑에서 물길을 연다. 수렵과 농경, 사냥이 손쉬운 곳. 선사인들이 이곳을 거주지로 정한 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주변 동서변동에선 대구 최초로 신석기 빗살무늬토기 유적이 발견됐고 신천 자락에선 청동기문화 벨트가 형성되었을 만큼 이 근방은 일찍부터 선사문화의 태동지로 주목을 받았다. 출토 유물로 추정한 연암산 유적지의 연대는 초기 철기시대. 대략 2세기 전후로 추정된다. 이 시기 대구는 4, 5개 그룹의 부족들이 일정 영역을 나누어 할거하던 시기였다.

당시 소국(小國) 같은 정치체제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며 부족 집단들은 일정 지역을 근거로 통치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부족의 수장(首長)은 해당 지역 물자의 생산과 분배, 교역을 통제했다. 각지에서 생산된 농산물이나 어로, 금속, 석기 등은 이웃 부족들과 교역을 통해 대구 전역으로 유통되었다.

◆연암산은 유구석부 전문 제작장 터=이제 연암산 유적의 정체가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렇다. 연암산은 대구의 홈자귀 제작과 공급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이런 특징은 홈자귀 제작 과정을 보면 상세히 나타난다. 이곳 석부들의 완성품에서 미완성품에 이르는 모든 석기들을 관찰해보면 형태적 획일성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가격(flaking)이나, 연마 과정 등 기술이 모두 동일 기법으로 나타나고 모든 제작과정이 단일 공정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윤용진 경북대 명예교수(고고인류학)는 "연암산 일대에 대규모 거주 집단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데도 석기들이 대량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 이곳이 홈자귀 전문 공방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정리했다.

석기들의 유통 과정을 추정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연암산 지형을 볼 때 석기의 수송 경로는 육로보다는 수로가 중심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연암산에서 배를 띄우면 신천을 거슬러 가창, 상동, 중동까지 이르고 금호강, 낙동강을 따라가면 월배, 진천까지 원스톱 뱃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윤 교수는 이곳에서 제작된 석기들이 지역 내 세력 집단 간 상호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전제하고 대구권역을 벗어나 외지로도 공급되었을 가능성도 지적하고 있다.

즉 초기 철기시대 마을들이 외지와 연결이 쉬운 외곽 강가에 자리 잡은 경우가 많다고 분석하고 그렇다면 신천, 동화천, 금호강 주변의 역내뿐 아니라 외지를 아우르는 광역 교역망이 형성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강조했다. 이 경우 금호강 수계인 상주나 경산, 영천, 낙동강 수계인 구미나 고령까지 수운으로 연결되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석기 제작용 돌들은 어디서 왔을까=연암산 유적에서 또 하나의 의문은 수많은 돌의 출처다. 산을 둘러보면 주변의 돌들은 모두 잡석으로 석기 제작에 적합지 않은 재질이다. 그렇다면, 이 돌들은 어디서 온 걸까.

주변을 조사했던 윤 교수는 석기 제작에 쓰인 돌은 대부분 팔공산의 계곡이나 가창 지역에서 가져온 것이라 말한다.

돌의 출처로 지목된 곳은 모두 직선거리로 3, 4㎞ 정도. 그러나 적지 않은 양의 돌을 수송하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수로를 이용한다고 가정하면 쉽게 의문이 풀린다. 팔공산, 가창 두 곳 모두 신천과 동화천으로 연결돼 재료의 수급과 완제품의 공급이 한 동선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윤 교수는 발견된 석재들에 모두 박편 흔적이 나 있는 것으로 보아 원석을 그대로 가져왔다기보다는 산지에서 1차로 재단한된 후 반제품 형태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고 추측했다.

◆마무리하며=석기 제작장의 발견은 전국적인 현상이다. 주변의 고령, 김천은 물론 대구 월성동에서도 대규모 공방 유적이 확인된다. 석기 제작장은 고대의 타임캡슐이라고 할 만큼 유적의 시기를 연구하는 데 결정적인 자료다.

보통 고대 공방에선 마을에 필요한 모든 생활필수품들이 만들어진다. 마을 주민들이 공방을 공유하면서 공동 작업을 했던 흔적도 보인다. 그러나 연암산 공방은 일반 제작장과 달리 홈자귀, 단일 품목만 생산되고 있다. 도구 제작의 모든 공정이 한 곳에 집중돼 있다.

이는 지역의 생산 유통 체계가 전문화, 특화 단계로 진입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사회 발전 과정의 의미 있는 변화로 풀이된다. 전문 수공업집단의 출현과 사회의 분화, 이를 통제할 수장의 출현, 이런 현상은 이제 대구가 혈연, 부족 단위 사회를 넘어서 국가 단위 정치체제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글'사진 한상갑 기자 arira6@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