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살 소녀 공주는 새 인생을 시작하려 하는 중이다. 전학을 했지만 당장 갈 곳이 없어 전 학교 담임 선생님의 어머니네에 잠시 머물기로 한다. 그녀가 맘 편히 쉴 곳은 없다. 자유롭고 자기중심적인 선생님 어머니는 공주가 달갑진 않지만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녀의 사정을 캐묻지 않는다.
이수진 감독의 데뷔작 '한공주'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후, 세계영화제들을 돌며 계속해서 수상의 낭보를 전해주고 있는 올봄 최대 기대작이다. 스위스 프리부르국제영화제 대상, 모나코 마라케시국제영화제 대상, 네덜란드 로테르담국제영화제 대상, 프랑스 도빌아시아영화제 심사위원상과 관객상 등을 수상했고, 마틴 스콜세지 감독과 프랑스 배우 마리앙 꼬띠아르의 극찬이 더해져 더욱 화제를 모으고 있다.
어느 소도시에서 수십 명의 남학생으로부터 폭행을 당한 여학생이 한공주 캐릭터에 반영되었다. 영화는 끔찍한 성폭력이 이루어진 후, 피해자 여학생이 새로운 삶을 다시금 살아가야 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영화 도입부가 꽤 진행되어도 관객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세히 모른다. 그러나 주변인들과의 관계, 공주의 한마디 말과 행동을 통해 그녀의 인생에서 전환점이 되었던 어떤 커다란 사건이 일어났음을 유추할 수 있다.
영화는 세상을 놀라게 했던 사건 자체를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길을 택하지 않는다. 대신 일상으로 복귀한 공주라는 캐릭터를 꼼꼼히 보여주는 것에 집중한다. 1980년대 박철수 감독, 윤여정 주연의 '어미'(1985)에서부터 '오로라 공주'(2005), '세븐 데이즈'(2007), '돈 크라이 마미'(2012), 지금 개봉 중인 '방황하는 칼날'까지 성폭력을 다룬 많은 영화가 남은 가족의 복수 여정을 보여준다. 피해자를 중심으로 한 영화들도 있지만 '텔미섬딩'(1999),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2010), '나쁜 피'(2012) 같이 이 또한 대개는 복수에 초점을 맞춰왔다. 가해자 손자를 대신해 피해자에게 사죄하는 양심적인 할머니를 다룬 이창동 감독의 '시'(2010)가 복수 서사 영화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영화로 큰 울림을 주었고, 피해자의 내면을 따라가는 영화로는 '여자, 정혜'(2005)가 있었다.
'한공주'는 '여자, 정혜'나 '시'와 같은 영화 군에 속한다. 끔찍한 사건과 이후의 복수를 보여주는 비장미 넘치는 드라마가 아니라, 커다란 아픔을 누르고 삶을 이어가는 한 캐릭터의 힘겨운 여정을 중심으로 한다. 영화의 플롯은 현재 이야기와 과거 이야기, 두 개의 이야기 축들이 교차하며 진행된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눈치를 보고 숨죽이며 최대한 예의 바르게 생활하는 소녀가 어쩔 수 없이 여러 사람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 현실의 시간 진행 가운데, 불현듯 과거의 기억들이 불쑥불쑥 끼어든다. 그렇게 관객은 소녀의 엄청난 비밀의 실체에 다가가게 된다.
공주는 특별한 게 없는 아이다. 잘 하는 게 별로 없고 영리하지 않으며 조용히 지낸다. 영화 대부분은 공주의 시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영화에는 주인공 공주의 클로즈업이 많다. 관객은 소녀의 두려움을 담은 눈동자와 필요한 말만 하는 입술, 소심한 행동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그녀가 처한 차가운 현실을 체감한다. 영화는 관객 참여적이다. 사건의 정황을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아도 추리와 상상을 통해 비밀의 모자이크를 하나씩 쌓아가는 영화보기 방식은 이야기에의 몰입도를 최대치로 끌어낸다.
내면에 꿈틀대는 거대한 분노를 무표정한 얼굴로 감추고 생활하는 주인공의 힘겨운 일상 투쟁은 커다란 아픔이 되어 보는 이들의 가슴을 찌른다. 겉으로는 담담하지만 속에서 타오르는 뜨거운 무엇, 두꺼운 얼음 속에 자리한 불꽃이 언젠가는 밖으로 터져 나올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영화 내내 끊이지 않는다. 그녀가 소질 없는 수영을 열심히 배우는 이유, 예쁜 목소리로 노래하지만 남들 앞에 나설 수 없는 이유, 마침내 기댈 친구를 얻었지만 마음을 열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씩 밝혀지며, 우리는 작은 소녀의 내면에 자리한 거대한 실체에게로 다가선다.
이 영화는 실화를 모티프로 한다. 당시 그 사건은 마을 유력자의 자제들이었던 가해자 남학생들, 무성의한 경찰, 도시에 대한 악명이 외부로 전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시 관계자들의 공모로 조사가 은밀하게 진행되어 처음부터 공정성을 상실했다. 피해자는 숨죽이며 살아가고, 가해자는 법의 이름으로 죄 갚음을 했다고 여기며 멀쩡히 살아가는 불공정한 세상에서 이 영화의 가치는 빛이 난다.
영화를 본 후에도 오랫동안 공주의 얼굴이 떠나지 않는 이유는 주인공을 맡은 신예 천우희의 놀랍도록 자제력 있는 연기에 힘입은 바 크다. 독립영화로서 좋은 흥행기록을 보여준 '똥파리'(2008),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2'(2012) 이후 오랜만에 관객의 호응이 기대되는 독립영화다.
정민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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