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에세이 산책] 그것도 사랑이었을까

1992년도, 대구의 극장가에는 장안의 화제였던 '야한' 영화 두 편이 거의 동시에 상영되고 있었다. 샤론 스톤의 '원초적 본능'과 제인 마치, 양가휘 주연의 '연인'이었다. 원초적 본능이 마케팅이라는 화장발로 관객을 유혹했다면, 장 자크 아노 감독의 '연인'(The Lover)은 눈요깃거리와 작품성을 고루 갖춘 보기 드문 수작이었다. 그 밑바탕에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자전적 소설 원작이 있었다.

1920년대 말, 황토색의 강물이 넓게 흐르는 메콩강 배 위에서 프랑스의 식민지 베트남에서 학교를 다니던 프랑스 소녀와 정략결혼을 위해 유학에서 돌아오는 중국 청년이 만난다. 화교(華僑) 재력가의 아들인 청년은 궁벽한 변방의 나라에서 뜻밖의 백인 소녀를 보자 한눈에 반한다. 배에서 내린 남자는 기숙사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소녀를 차에다 태운다. 뒷자리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 마치 자장에 이끌리듯 서로에게 호감을 갖는다. 그런데 남자가 소녀를 좋아한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소녀가 남자에게 마음의 문을 연 것은 다소 의외이다. 인종차별이 엄연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말이다. 그건 바로 경제력 때문이었다. 기사가 딸린 고급스러운 큰 차를 탄 남자의 경제적 배경에 반한 것이다. 소녀는 돈 많은 남자와의 육체적 사랑을 통해 절망적인 현실에서의 도피를 꿈꾸고 금전적 이득도 취한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이른바 '원조교제'를 다룬 영화이다. 소녀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인 남자와는 철저한 조건 만남이었다. 남자에게 자기를 사랑하지 말라 하기도 하고 자신도 중국인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심지어는 본국으로 귀환하던 날 배가 움직이면서 한쪽 외진 곳에서 지켜보던 남자의 차를 발견하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 작별임에도 말이다. 그러던 그녀가 며칠째 항해 중이던 배 안에서 갑자기 격정에 휩싸인다. 갑자기 그가 그리워진 것이다. 뒤늦게 그 남자를 사랑했음을 깨닫는다.

과연 그들의 만남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남녀 간 정이란 지극히 사적(私的)이라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시작될지 모르고, 또 그 나름의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남의 애정사에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겠다. 아직은 지천으로 꽃 잔치지만 곧 연분홍 치마 휘날리던 봄바람도 잦아지리라. 우리를 설레게 했던 봄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청춘들이여! 이 봄이 가기 전에 사랑에 한번 빠져보면 어떻겠는가.

장삼철/(주)삼건물류 대표 jsc103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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