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우리 시조로 푼 한시] 江華洋亂 (강화양란) / 의암 유인석

강화도는 고려를 지키는 요충지인 동시에 한양을 침범하는 왜구를 물리치는 요새지이기도 했다. 초지진, 광성보 등이 그때의 일을 말해준다. 수많은 양민들이 싸우다 죽어갔고, 의병의 푸른 목숨들이 초개와 같이 숨을 거둔 곳이 강화도다. 프랑스 함대가 쳐들어와 양민들을 학살했던 혼적들이 지금도 생생한데, 그때 약탈해간 외규장각(外奎章閣)은 아픈 상처를 어루만지게 된다. 이토록 어려운 시기에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태평성대 오래도록 편안히 지냈는데

서양인 침범 소식 강화에서 전해오네

선비들 불끈 일어나 나라 은혜 갚아야지.

昇平世久恬嬉存 報急沁城洋祲昏

승평세구념희존 보급심성양침혼

都民鳥散震宸念 壯士雲興重國恩

도민조산진신념 장사운흥중국은

【한자와 어구】

昇平世: 태평성대. 久: 오래도록. 恬嬉存: 편안히 지내다. 報急: 급히 전해지다. 沁城: 성내에 스며들다. 洋祲昏: 서양인들 침범해 혼미해짐. // 都民鳥: 백성들. 散震: 벼락치듯 흩어지다. 宸念: 궁궐을 걱정하다. 壯士: 장사들. 선비들. 雲興重: 구름같이 거듭 일어나. 國恩: 나라의 은혜 갚으려네.

'백성들 달아나고 임금께서 근심하니'(江華洋亂)의 율시인 전구의 칠언체이다. 작자는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 1842~1915)이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할 때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김홍집의 친일 내각이 구성되자 의병을 일으켰으나 관군에게 패하고 만다. 그 후 만주에서 국권 피탈 뒤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태평성대 오래도록 편안히 지냈는데 / 양놈들 침범 소식이 강화에서 전해졌네 / 백성들 달아나고 임금께서 근심하니 / 선비들이 불끈 일어나 나라 은혜 갚으려네'라는 시상이다.

이 시제는 '강화에서 발생한 서양인 난동'으로 번역된다. 병인년(1866년) 8월에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했다는 구실을 삼아 조선을 침략했다. 지금의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양화진까지 왔다가 돌아가 병력을 보강하여 9월에 재침입해 서적을 약탈해 갔다. 온 나라가 흉흉했는데 피란을 가거나 강화(講和)하자는 논의가 많았다.

시인은 태평성대를 누리던 조선이 염려하던 일본은 오히려 잠잠했지만, 서양의 문물이 우리나라를 넘보고 있다며 걱정했다. 그만큼 우리가 방비에 소홀했음을 암시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약한 모습도 강하게 보여야 하는데 더욱 약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화자는 백성들이 달아나고, 임금이 앉아 근심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렇지만 꺼져가는 나라의 비운을 보고 선비들이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는가. 화자는 일어선 선비들의 모습을 보고 그나마 마음을 가라앉히게 된다.

의암 유인석 (1842~1915)은 대한제국의 학자이자 의병장이다. 고종 13년(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할 때 문하의 유생을 이끌고 상소하며 반대했다. 고종 31년(1894년)에 김홍집의 친일내각이 구성되자 의병을 일으켜 충주와 음성, 제천·단양 등지에서 활발한 항일의병활동을 전개했다.

의병항전은 을미변복령이 내려진 직후 이 '변고'(變故)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고종 32년(1895년), 문인사우(門人士友) 수백 명을 모아놓고 장담에서 대규모의 강습례와 향음례를 거행한 것에서부터 유래한다. 대한 광무 11년(1907년)에 전국의 의병·해산 군인들이 원주에 모여 13도 창의군(倡義軍)을 조직해 항일의병운동을 전개할 때 의민공은 평안도 순천군에서 김여석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대한 융희 3년(190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 등과 두만강 연안으로 진격하려 했으나 러시아 관헌에게 체포됐다. 경술국치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1915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기인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장희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시조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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