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가장 잔인한 달/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기억과 욕망을 뒤섞으며/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차라리 겨울은/우리를 따뜻하게 하였다/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감싸고/마른 구근으로 가냘픈 생명을 키웠으니/…'
20세기 최고 최대의 걸작 시라고 불리는 T.S 엘리엇의 '황무지'는 바로 이런 시구로 시작된다. 엘리엇의 황무지는 모두 5부 434행으로 동서고금의 문학과 사상에 35번에 걸쳐 인용되었고 단테나 셰익스피어, 심지어 불경과 바그너의 가극, 우파니샤드에까지 인용되었다.
왜 엘리엇은 4월을 잔인하다고 했는가? 칼날처럼 내려꽂히는 이 시의 첫 선고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토록 눈부시게 아름다운 4월을 잔인하다고 하기에는 너무 슬프지 않은가?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흔드는 4월의 이 신비한 목숨이 너무 가엾지 않은가, 너무 서럽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오늘 드디어 내 방식대로 엘리엇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감싸고 마른 구근으로 생명을 키우고 있는 황무지의 겨울을 노래한 엘리엇의 백치의 평화로 돌아가고 싶다. 생의 욕망을 불어넣어 뜨거운 꿈을 탄생시키며 갖은 상처와 불행으로부터 생명을 앗아가는 4월의 잔인성을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차라리 망각의 겨울, 모든 생명의 싹을 냉엄한 땅이 억누르고 있었던 죽음의 겨울은 얼마나 평온한 것인가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황무지의 평화를 잊고 생명을 키우고 목숨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우리의 운명은 누가 내린 형벌인가?
삶도 죽음도 아닌 생중사(生中死)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우리는 어디에 기대어 희망을 이야기할 것인가? 우리는 실낱같은 목숨을 붙이고 살아가야 하는 나약한 존재에 불과한 것인가? 불완전한 세상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불행 속에 살아야 하는 불안과 공포를 우리는 무엇으로 극복해야 하는 것일까? 메마른 사회의 체질화된 구조와 그 안에서 메말라 가는 인간 영혼의 황폐화 속에서 우리가 두려워했던 지옥은 형성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지옥과 천당은 우리가 남겨둔 저 세상의 것이 아닌 우리가 만들어 가고 있는 오늘이 아닐까? 삶의 고통과 죽음의 처참함을 견디며 목이 메도록 불렀던 신의 이름, 신의 보이지 않는 가슴에 손을 얹고 한없이 기도했던 우리들의 간절한 마음은 차가운 망망대해 어디에서 헤매고 있는 것일까? 절박한 고통 앞에서 존재의 중심이랄 수 있는 신의 존재마저 부정하는 분노하는 슬픔 앞에 믿음도 희망도 흔들리고 있다.
이 지구 상에 전설의 배로 남아있는 타이타닉호의 선장인 에드워드 스미스, 길이 263m 배수량 5만t에 가까운 초호화 여객선 타이타닉호는 빙산 경고를 무시하고 속도 경쟁을 하다가 빙산과 충돌한 후 2시간 30분 만에 차가운 대서양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다. 이 배를 책임진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은 끝까지 배에 남아 항해사와 기관사들을 지휘하며 승객들의 탈출을 돕다가 사망했다. 빙산 경고를 무시하고 속도를 냈던 자책감에 스스로 탈출을 포기한 채 조타실 문을 잠그고 배를 지켰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본 선상 악단의 리더였던 월리스 하틀리의 눈물겨운 연주를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생과 사의 숨 막히는 긴박감 속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승객들의 두려움과 불안을 진정시키기 위해 끊임없는 연주로 최선을 다하던 그도 약혼녀 마리아 로빈슨이 선물한 바이올린을 껴안고 배와 운명을 같이했다.
부모와 오빠를 잃고 혼자 구조된 어린 아이의 까만 눈동자를 보면서 인간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운명의 희생양이라고 쓰며 나는 울먹인다. 질서와 원칙을 지키라는 어른들의 호된 가르침을 자신을 위협하는 위험 속에서도 지키려 했던 아이들, 별과 꽃과 꿈의 노래로 가득했던 아이들을 차가운 물속에 남겨두고 죄 많은 어른은 서로 질타하며 또 하루를 보낸다.
4월은 진정 가장 잔인한 달인가? 이 땅의 모든 목숨들이 통곡하는 소리를 들으며 잔인한 4월은 깊어가고 있다. 무심한 4월의 하늘 아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린싹이 자라고 있는 작은 화분들을 따스한 햇볕 속으로 내어놓는 일이다.
황영숙/시인·대구문인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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