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침몰했다. 수학여행에 나선 단원고 학생들을 싣고 가던 세월호가 바닷속에 가라앉으면서 대한민국 정부의 무능함이 단번에 드러났다. 학생 325명 중 75명만 구조되었고, 침몰 후에 정부의 구조대가 구출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이번 사고는 2003년 2월에 발생한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와 기막히게 닮았다. 우연일까. 한국형 참사의 유형일까. 10년이 지나도 재난에 대한 한국의 풍경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선장과 선원은 승객과 배를 버리고 탈출했고, 구조 활동은 유가족의 조언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지경이다. 세월호 참사는 바다 위에서, 대구지하철 사고는 땅 밑에서 발생했으며, 목숨을 앗아간 것이 물(水)과 불(火)이라는 차이뿐이다.
대구지하철 화재 사고는 정신병력 소유자의 방화에서 비롯되었다. 범인은 현장을 빠져나와 치료를 받다가 체포되었다. 승객들이 대피할 기회가 있었으나, 3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는 대참사로 이어졌다. 역에 진입한 후 화재를 인지한 기관사는 본부사령실에 보고했고, 사령실은 "기다려라"는 지시를 했다. 뒤늦게 사령실은 기관사에게 "중앙로 역을 떠나라"고 명령했다. 기관사는 객차에 승객들을 꼭꼭 가두어 둔 채 자기만 살자고 마스터키를 빼들고 도망을 갔다. 지하철 화재 진압에 대한 대비와 장비가 거의 없이 출동한 구조대는 사고 발생 후 3시간이나 현장 진입을 못해 골든타임을 놓쳤다. 현장 수습, 유가족 대책 등의 혼란도 세월호 참사와 빼닮았다.
그나마 세월호 사고에서 대구지하철 참사 때와는 달라진 것이 있다. 세월호 사고에서 구조된 학생들은 지금 고려대 안산병원의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심리치료를 받고 있고, 사고 현장에는 실종자 가족들을 위한 정신건강 캠프가 설치되어 있다. 학생들이 병원에서 치료와 수업을 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안산시 통합재난심리지원단은 치료를 받고 퇴원하는 학생들을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추적 관찰이 필요한 학생에게는 개인 주치의를 붙이기로 했다. 이런 치료들이 학생들의 고통과 슬픔을 어느 만큼 덜 수 있을지 미지수이지만,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학생들을 보살피고 위로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세월호 사고 며칠 후,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의 부상자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가능하면 세월호 사고 관련 뉴스를 접하지 않는다. 그때의 악몽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란다. 지하철 사고의 부상자들은 지금도 정신적으로 불안해하고, 자동차나 지하철 타기를 꺼린다. 성 기능 장애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 사람도 있다, 의학적으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하는 정신적 후유증(트라우마)이다. 베트남 참전 용사들이 불안에 시달리며, 배후의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벽 쪽에 등을 대고 생활하는 경우 등이 그것이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일상생활에서 경험할 수 없는 화재, 전쟁, 강간, 대형사고 등을 겪은 뒤에 발생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사고 직후 정신과적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의 경우 대구시는 부상자나 유가족들의 눈에 보이는 외상(外傷)에만 신경을 쓰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관해서는 무관심했고, 인식도 없었다. 지금까지 부상자들이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이유다. 부상자들은 사고 당시부터 정신적 후유증에 대한 대책을 호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최근에는 힐링 캠프라도 열어줄 것을 요구했으나, 대구시는 보상이 끝났다며 난색을 표한다고 했다.(대구지하철 화재 사고 부상자 대책위원회 위원장)
사고가 났을 때는 사후 대책이 중요하다. 망자(亡者)의 존엄을 지켜주고, 구조자 및 유가족 등 산 자들의 남은 생에 사고의 후유증이 남지 않게 해야 한다. 살아남은 자들이 평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배려해야 한다. 이번에 정신과적 지원이 신속하게 이루어진 것은 정부의 여러 조치 중 그나마 가장 정상적인 조치라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대구시는 지금이라도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의 부상자와 유가족들에 대한 정신 건강상태를 살펴야 한다. 세월호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산 자들이 생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
계명대 교수·국경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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