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촌동은 한때 대구 문인 묵객들의 정신적 고향이었다. 전후 유흥경기의 진원지였다. 대구 제일의 거나한 소비와 인파가 몰리는 골목이었다. 이제는 찾는 이 드문 늙은 여배우처럼 쓸쓸히 황혼길을 걷고 있는 향촌동을 보노라면 세월의 무상함과 더불어 가버린 사람들의 얼굴이 몹시도 그리워진다.' 오래전 매일신문에 '대구이야기'를 연재했던 작가 정영진이 '향촌동 전성시대' 편 말미에 남긴 글이다.
그렇다. 대구읍성 안에 위치했던 향촌동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기에 이어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소위 '시내'로 불리던 대구의 도심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향촌동은 철 지난 유흥지처럼 퇴락한 모습으로 노인들이나 가끔 오가는 낡은 거리가 되고 말았다. 그런 향촌동을 왜 특별히 기억해야 할까. 그것은 향촌동만의 고유한 역사와 정서 때문이다.
향촌동은 6'25전쟁과 함께 피란 문단이 형성된 곳이다. 1950년대를 풍미했던 문인 문객들이 드나들던 건물이 아직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들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한 잔 술에 목말라하며 표류하던 좁은 골목길도 여전하다. 그곳엔 그들이 뿌려놓은 낭만과 일화가 스며 있다.
피란 문인들의 기항지였던 음악감상실 르네상스 골목 끝에 구상 시인이 단골로 묵었던 화월여관이 있었고, 그 앞 백록다방에서 천재화가 이중섭은 담배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 인근 호수다방 앞에서 음악가 권태호는 지팡이로 행인을 가로막고 통행세(담뱃값)를 거뒀으며, 북성로 쪽 모퉁이에는 이효상의 출판기념회가 열린 모나미다방이 있었다. 르네상스 남쪽 골목 끝에는 젊은 작가들의 문화살롱이었던 녹향이 있었고, 그 2층에 단골 곤도주점이 자리했다.
향촌동은 피란 문인들과 문화예술인들이 전쟁의 후유증 속에 실향과 이산의 아픔을 나눈 곳이다. 삶의 고뇌와 문학과 예술에 대한 꿈을 한 잔 술로 달래던 곳이다. 당시 대구 향촌동은 한국 문단의 중심지였다. 오상순, 김팔봉, 마해송, 조지훈, 박두진, 구상, 최정희, 최태응 등의 문인과 작곡가 김동진, 화가 이중섭 등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이 대구에서 피란살이를 했기 때문이다.
이들과 함께 한 향촌동은 전란의 여파와 가난의 질곡에도 낭만이 있었고, 피폐와 절망 속에서도 술이 익고 음악이 흘렀다. 피란 시절 향촌동은 우리 문화 예술의 요람이었다. 그래서 향촌동 시대 사람들의 삶과 문학 그리고 사랑과 예술 안팎에는 파란과 격동의 1950년대 한국문학의 지형도가 남아있다.
포연에 이지러진 시대, 허무의 강을 여울처럼 흐르다 간 최정희, 서정희, 장덕조, 이화진 등 여성문인들의 삶과 문학은 더욱 처연할 수밖에 없었다. 불운한 시절 모닥불 같은 삶을 문학에 사르고 간 그 여정은 어쩌면 오늘 우리의 실존적 원형을 잉태한 산고(産苦)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향촌동인 것이다.
우리가 당시 대구와 한국의 삶 한가운데를 껴안았던 향촌동 골목을 기억하고 다시 이야기하며 오늘에 되살리려는 이유이다. 향촌동은 아름다운 과거이면서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향촌동 입구에 있던 옛 은행 건물을 리모델링해서 향촌문화관과 대구문학관을 만든다니 반가운 일이다. 6월 말 개관 예정인 향촌문화관은 향촌동이 대구의 또 다른 명품 골목투어 코스로,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공간으로 되살아나는 전기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화예술인은 물론 대구시와 중구청 그리고 언론과 시민, 상가 주민들도 힘을 모아야 한다.
21세기 도심재생 사업과 도시 문화공간 조성은 형식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의 일상적인 삶과 어우러진 공간이어야 생명력이 있기 때문이다. 피란 문인과 향토 예술가들의 일화가 깃든 옛 술집과 다방 그리고 음악감상실 건물에 간략한 스토리를 담은 표지판을 달아 위치와 공간을 보존하는 게 급선무일 것이다. 그리고 연극과 영화를 위한 장소를 확보하고, 화실과 화방을 유치하며, 골동품점과 고서적을 취급하는 책방과 악기점, 레코드가게 등 문화예술 관련 업소들이 하나 둘 들어서면 좋겠다.
향촌동 골목이 아날로그적인 문화예술의 거리로 새 단장을 하고, 디지털 세대들도 가쁜 삶의 편린이나마 쉬어가는 공간으로 부활했으면 한다. 향촌문화관 개관이 향촌동의 문화예술적 테마거리 복원을 견인하는 분수령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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