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동호동락] 반려동물 키우기-거절의 미학

어릴 적 나는 우유부단하고 거절을 잘 못하는 편이었다. 특히 싫다는 표현을 잘 못해서 길거리에서 마주친 낯선 사람들에게 붙잡혀(?)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 허다했다. 그래서 대학 시절 교정에서 영어 교재를 파는 사람에게 붙잡혀 두 시간 가까이 시달린 적도 있었으며, 종교인에게 30분 넘게 선교활동을 당한 적도 있었다.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지금도 역시 우유부단하고, 마치 그런 성격이 얼굴에 쓰여 있기라도 한 듯 길에서 '기운이 좋다'는 말과 함께 이야기 좀 하자고 붙잡히는 일도 여전하지만 그래도 요즘은 잘 빠져나오는 편이다.

이렇게 갈수록 더 확실하게 '거절'을 잘할 수 있게 된 것은 나이가 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우리 집에 살고 있는 두 마리의 '거절의 달인'(?) 덕분일지도 모른다. 나와 달리 체셔와 앨리샤는 아주 손쉽게 거절을 잘하기 때문이다. 고양이들은 좋게 말하면 '자기주장'이 확실하다고 할 수 있겠고, 조금 좋지 않게 말한다면 '이기적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으리만큼 확고하게 좋고 싫다는 의사표현을 잘한다. 우리 집 녀석들만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녀석들은 늘 '싫은 일투성이'이기에 '거절'에 몹시 익숙하다. 앨리샤에게 엉킨 털을 빗어 내리는 일, 발톱을 깎는 일들은 '거절하고 싶은' 싫은 상황이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바로 '앵' 하면서 짜증 섞인 소리를 내뱉는다. 그리고 사람에게 안겨 있는 것도 때에 따라선 싫은 일이기에 앞발을 길게 내뻗어 나의 손을, 얼굴을 떠밀어낸다. 고사리 같은 앞발에 딱히 엄청난 힘이 실려 있거나 아프거나 하진 않지만 웃기면서도 차가운, 앨리샤 나름대로는 확고한 거절의 표현이다.

체셔는 앨리샤보다 한 술 더 뜬다. 싫은 상황엔 그 자리를 즉각 벗어나 버리는 것이다. 벌떡 일어나서 다른 자리로 가버리는 것은 말을 아끼는 과묵한 체셔가 가장 잘하는 거절 표현이다. 그리고 안겨 있는 게 싫을 때면 사람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치 자기가 '말'인 것처럼 거센 뒷발질로 발버둥쳐서 벗어나는 가장 과격한 '거절'을 한다. 웃긴 것은 그러다가도 기분이 좋아지면 또 언제 그랬느냐는 듯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한 골골송을 부르며 발라당 누워서 애교를 부린다는 것이다.

'고양이는 개보다 머리가 좋다. 고양이 8마리에게 썰매를 끌라고 하면 거절할 것이다.'(제프 발데즈) 몇 년 전 고양이에 관련한 격언을 찾다가 발견한 문장이었다. 두 마리의 고양이를 지켜보며, 거기다 최근에 한 마리의 강아지까지 함께 살며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하자면 첫 번째 문장은 몰라도 두 번째 문장만큼은 '절대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할 수 있다. 알래스카의 썰매 개들이 사람들의 부탁을 들어 썰매를 끄는 '순종적'이고 '복종적인' 착한 개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면, 제프 발데즈의 격언에서 나오듯 썰매 끌기를 시킨다면 단호하게 거절할 줄 아는 고양이는 자신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 싫은 일은 거절할 줄 아는 전형적인 고양이의 모습이다.

내 눈엔 착한 개가 더 낫다든가 거절할 줄 아는 고양이가 더 똑똑하다고 하기에 앞서서 그렇게 단호하게 거절을 잘하는 고양이의 모습이 당당해 보여서 좋다. 왜냐하면 늘 '거절'이 힘들었고 그 때문에 곤란을 겪었던 내 경우에 비추어 보면 말을 돌리는 것보다 차라리 확고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을 때가 난처한 상황에서 좀 더 빨리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거절'이 힘들다. 하지만 그 나름대로의 '거절의 미학'을 가지고 싫은 일들을 거절해대는 녀석들을 보면서 나도 차츰 거절에 익숙해지는 게 아닐까 싶다. 물론 나는 사람인지라 '부당한 요구'에 대한 거절만 단호하게 해야겠지만 말이다.

장희정(동물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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